사도행전 11:1-18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유대에 남아있던 사도와 형제들의 관심은 베드로가 이방인들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방인들을 무할례자라고 지칭했다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성령이 명하신 사건이라고 밝혔다. 동행한 여섯명의 증인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방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받을 말씀응)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유대에 남아있던 사도와 형제들은 잠잠할 수 밖에 없었다. 반박 대신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

구원은 하나님 말씀을 받는 것이요,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차별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이방인과 함께 먹고 마신 베드로의 행위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10:34-48

베드로의 첫마디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를 출신에 상관없이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음은 할례자나 무할례자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의롭게 사는지에 관심을 두신다.

성령은 가난한 자와 가진 자가 함께 물건을 통용하게 하셨다.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불통도 소통으로 바꾸셨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도 하나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방인들 마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게 하셨다.

성령충만은 성도들 사이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우째 당짓기를 그리 좋아하는지… ㅠㅠ

서로 사랑하라! 말씀이 가르치는 핵심이다.

 

사도행전 10:17-33

말씀도 환상도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으로 깨달아야 한다. 환상에 대한 베드로의 의아함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방문으로 깨달아 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해 주셔서 해결된 것이다. 베드로는 순종하고 부정하다 여겼던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자신의 방문 목적을 말하면서 고넬료가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서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베드로를 초청했다고 방문목적을 말했다.

베드로는 다음날 (밤이 늦어 하루를 유숙했는지, 아니면 고넬료 이야기를 듣는라?)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출발했다. 욥바시내에 있던 형제 몇명도 함께 갔다.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들어 갈  때 고넬료는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맞이했다. 베드로가 숙여 고넬료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유대인인 자신이 이방인 집에 들어와 교제하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이라 (꺼리낌 없이) 왔다고 말했다. 고넬료도 베드로를 초청한 이유 역시 하나님의 사자, 천사의 지시 사항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과 더불어 주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아야 한다. 깨끗함과 부정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사항이다. (예수님도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다.) 이방성도와 유대인 성도간의 화목이 없이, 교회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을까?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었고,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제자들이 하나되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이 하나 되었고, 이제는 이방인도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된다.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인도 함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은 성도들 사이에 가난한 자와 부자의 벽을 허무셨다.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벽도 허무시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벽도, 그리고 이방인과의 벽도 허무신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성도들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령의 도우심 만으로 허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사도행전 10:1-16

고넬료와 베드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경건한 사람. 누가는 그의 경건을 집안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함과 백성을 많이 구제함과 하나님께 항상 기도함으로 설명한다. 이런 고넬료가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 하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생명책에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지/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해변가에 있는 가죽업을 하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초대하라고 명했다.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명에게 주의 사자 (천사)의 말을 일러주고 욥바로 보낸다.

다음 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다달았을 때 베드로는 오후 1시 기도시간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했다. 시장기를 느낀 베드로는 음식을 요청했고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다.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유대인에게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동물들이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먹지 아니하였다고 대답했다. 다시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환상이 세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려졌다.

항상 어려운 본문이다.

고넬료. 그는 성도인가? 그의 경건에 부족함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자주 구제하고 기도시간을 꼬박 지키는 사람. 주의 천사는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성도의 교제다. 고넬료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속되다. 깨끗하지 않다라는 편견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서 나온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방문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다. 룻다, 사론, 욥바에서. 그러나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가이사랴에는 (아직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곱 헬라파 유대인 중의 한명인 빌립이 이미 가이사랴에 복음을 전파한 후였다. 그렇다면 고넬료도 이미 하나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다만 천부장의 명령하에 있던 백부장이라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초청하게 하고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유대인과 헬라인도 차별없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방전도는 이미 빌립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체적인 사귐, 성령안에서의 교제는 이제 시작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다.

 

사도행전 9:32-43

‘그 때에’로 시작한다. 그 때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던 때다. 이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 왜? 첫번째는 복음전도 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복음전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대신 성도들을 든든히 서가게 한 사건이 나온다. 첫번째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지내던 애니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룻다뿐 아니라 인근 사론에 사는 사람들도 주께로 돌아왔다.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교회에 믿는자의 수가 더해진다. 교회가 자란다. 두번째

욥바에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하던 다비다 (도르가)라고 부르는 여제자가 죽었다. (사람들은 도르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눕혀 두었다.) 욥바에 있던 제자들이 가까이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불러왔다. 욥바에 온 베드로는 다락에 있던 사람들을 내 보내고 혼자 무릎꿇고 기도한 후 다비다를 살렸다. 베드로는 다비라를 일으켜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비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을 보여 주었다. 욥바에서도 이 사건을 인해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

첫번째 두번째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베드로의 복음전도 사역이 아니다. 교회를 든든히 서 가게 하는 사건이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된다. 복음전도도 필요하지만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기 위해서는 주를 경외함으로 성도들 간에 피차 복종함 (서로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의와 평화와 희락 (기쁨)의 나라지만 당연히 희노애락이 다 있다.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해야 한다. 성령께서 성도들간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오늘도 성도는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내실에 충실해야 하는데, 내실이 무너지는 교회들, 성도들의 수가 줄고 ‘가나안’이 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 때에 베드로 사도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을 찾아 다니며 주를 경외함으로 성령의 위로함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그 때에 베드로가 움직였다. 이번에는 룻다(와 사론)와 욥바지역이다. 전도여행이었을까? 누가는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에대한 심방임을 강조하는 듯 하다.

‘그 때’는 앞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1)와 연결된다.

애니아를 고치고 도르가(다비다)를 살렸다. 이 사건들로 룻다와 사론, 욥바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주를 믿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야 교회가 자란다. 주를 경외함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로 드러난다. 성령의 위로함은 핍박받는 교회에 풍성히 부어진다. 교회가 건강하면 교회는 자란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