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4-13

스데반의 순교로 사도들을 제외한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누가는 곧바로 (헬라어 성경공부반의 교사로 뽑힌 일곱명 중 하나인) 빌립이야기로 넘어간다. 장소도 사마리아 성이다.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 곧 복음전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했다.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빌립은 예수님처럼 (찾아가서) 가르치고 병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했다. 예루살렘에 앉아서가 아니라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유대인인 빌립의 사마리아행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한 그 사랑에 대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과 북이 가깝지만 멀듯이) 사마리아는 유대인에게는 가지 말아야 할 이방, 즉 땅끝과 다를 바 없었다. 빌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것으로 적용했을까? 성령의 이끌림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파된 결과 사마리아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다. 하나님나라는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다.

복음을 듣고 세례받은 자 중에는 마술사 시몬도 있었다. 그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로부터  시느님, 갓몬이라는 (신이 내린 능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마술사였다. 그런 시몬도 빌립에게서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동안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의 변화를 시몬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마술이나 속임수가 아닌 능력에 그 역시 믿고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으며, 빌립의 표적과 능력에 놀랐다.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르치는 것은 믿고 세례받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믿다’ 동사가 ‘믿음’ 명사가 되기위해선 보혜사 성령님이 필요하다.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에 시몬은 믿고 세례받았지만 빌립의 능력과 표적을 이해할 수 없어서 놀랄뿐이었다.

성령받기를 사모해야할 이유다. 은사를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큰 일을 깨닫기 위해서다. (언제까지 놀라기만 할 것인가.)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갔다는 사실이 곧 복음의 능력이라고 되씹어 본다.

 

사도행전 7:54-8:3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르르는 도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공회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닫혔으나 하늘을 향해서는 열렸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였지만 회중소리에 묻혔다. 이미 저들은 스데반의 말에는 귀를 기울지 않았다. 오히려 귀를 막아버렸다. 누가는 공회 앞에선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했는데 회중은 눈에도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 었다. 스데반을 공회에서 끌어내어 성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서 죽였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끌고가 십자가 형을 받아내고 로마병사들로 하여금 형을 집행하는 법적절차도 생략된 인민재판이었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불법을 저지르게 하는 전형을 보여준다. 이때 청년 사울이 등장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울, 그의 눈도 할례받지 못하기는 한가지였다. 그러나 스데반을 보라. 성부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했다. 회중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간구하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지만 종교적 열심에 눈이 먼 사울은 이 사건을 옳게 여겼다. 그래서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에 앞장 섰다.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성도들을 옥에 넘겼다. 결국 성도들은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

복음은 땅끝을 향하고 있다.

종교적 열심으로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사도행전 7 :37-53

아이러니다. 이스라엘은 ‘모세’ 라는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그래서 스데반을 고소할 때 모세와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지자로 세우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얼굴과 입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모세에게(원망과 불평을 일삼았다) 불순종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불순종이라 하셨다. 결국 모세와 하나님에 대한 모욕죄는 (스데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짓고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이름으로’ 에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순종이 동반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열려라 참깨’ 와 같은 주문이 결코 아니다.

성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백성가운데 거하시길 원하시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는다.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간구를 들어달라고 했다. 성전에 대한 이해부족을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이 조상때부터 성령을 거스려서 생긴 결과라 한다.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면서 성전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밝히는 것이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스데반이 만약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고 있는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변론을 녹음해서 다시 듣는다면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까. ‘어 내가 이렇게 말했어.’

“너희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는 결론은 항상 유효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7:17-36

스데반은 거짓 증언을 통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고발 당했다. 스데반은 자신이 (구약에서 배운) 모세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귀아프게 들은 모세의 사십년 사십년 사십년의 원조가 스데반이다. 첫 사십년

모세는 죽음의 땅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태어났다. 고작 백일도 안되어 죽음의 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바로의 딸의 아들로 (모세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아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다.

모세는 (혈통족으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자기 민족을 챙기려고 했다. 나이 사십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인정받고자 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구원자는 고사하고 재판관도 못되었다. 결국 살인자로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 두번째 사십년.

모세는 이방 땅에서 떠돌이 목자였지만 평범한 가정생활을 했다. 스데반은 두번째 사십년을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아들 둘을 낳았다’로 함축했다. 사십년이 차자 하나님께서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구원자로 부르셨다. 마지막 사십년

모세는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줄줄이 꿰고 있을 이야기에서 스데반이 강조한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32절

가시나무 떨기 불꽃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를 주목했다.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고발당한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은 동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은연중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수련회 새벽이다.

사도행전 7:1-16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부터 야곱의 죽음까지 열몇절에 담아내는 스데반. 그가 왜 헬라어 성경공부반의 선생으로 뽑혔는지 이해된다. 헬라어 뿐만아니라 히브리어에도 능통했을 터, 들으라 부형들이여라고 대제사장의 심문에 스데반은 대답을 시작했다.

6장에서 스데반이 모함받아 잡힌 이유는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째 부활로 참 성전되셨으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것을) 모세의 율법을 고치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성전이나 율법으로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지 표않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 율법보다 먼저 주어진 언약을 상기시키고 율법보다 상위법인? 할례를 언급했다. 성전보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함께하심이 먼저요, 율법보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먼저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6장에서 누가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말한다. 누가는 스데반을 주의 사자에 비유하고자 이 표현을 넣었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주의 사자, 한밤에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주의 천사. 스데반은 단순히 자기 변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자가 되어 ‘복된 소식’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

주의 사자로서의 담대함은 대제사장 앞에서 감히 ‘들으라 부형들이여’ 라고 마치 판결문을 낭독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누가 피고인지, 누가 재판관인지 뒤바뀐 모양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서 이미 복음의 담대함을 간접체험하지 않았을까?

이래저래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오늘 학생들과 찬양하며, 경배하며, 말씀 듣고 기도하는 일박 수련회 날이다. “하늘에까지 자라라”가 주제다. 함께 하늘에까지 자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