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5-23

[엡 1:15-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과 평강으로 인한 사랑이 구원이라는 소망을 향해 자라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알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의 소망으로 일하심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다.

나는 교회의 지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다.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돈, 건강, 학력, 명예, 권력… 이것들에 얽매였다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다.

구원에 소망을 두고 은혜와 평강으로 살게 하소서.

엡 3:1-13

그리스도 예수의 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 즉 구원의 비밀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즉 ‘갇힌 자’라고 밝힌다. ‘갇힌 자’가 소위 자유자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의 비밀은 쉽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도 들어도 이해되지 않아서 ‘비밀 (미스테리)’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설명을 읽으면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라고 적었다(4). 에베소 성도 자신들은 비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바울이 비밀을 이해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능력이다. 구원의 비밀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다.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다. 나의 말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의 설명을 들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 알려질 것이다. 내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 덕분이다.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된다는 것, 한 교회로 하나님의 일군, 지체가 된다는 것을 어찌 말로 설명하랴.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한몸, 한 교회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은 것은 성령 안이다(2:18).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간다(2:22). 그러니 미스테리다. 비밀이다. 바람과 같은 성령이니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이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이다.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내가 받은 것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래서 내가 일꾼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한다(엡 3:7). 그리스도의 은혜로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는 표현으로 적용한다. 능력을 받아서 이방인의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서라고 한다.(8)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작은자’ (세례요한의 좌우명을 적용한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3:30 공동번역) 바울을 통해 드러난다. 바울은 또 ‘교회로 말미암아’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을 교회의 지체로서의 자격을 분명히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다(11).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2) 이 길은 바울에게는 여러 환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알 수 있게 된 자들에게는 ‘영광’의 길이었다 (13).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나의 영광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게 하소서.

엡 1:1-6

엡 1:1-6

바울 서신의 전형적 문안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헬라식 (축복) 인사와 히브리식 (샬롬) 인사의 조합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런데

은혜는 3절하반절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에 고스란히 설명되어 있다. 한마디로 ‘영적 축복’이다. 그리고 4-6절에서 이 ‘영적 축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으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찬양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보다 은혜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거룩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가가 되는 영광스러운 선물. 그저 오늘은 본문을 읽고 또 읽고.

 

시 96

새 노래로 하나님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하나님께 노래할지어다. [시 96:1]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역사 (役事/Works)를 선포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경외해야 할 창조주이시다. 존귀와 위엄, 능력과 아름다움, 영광과 권능 어떤 수식어로 하나님을 다 노래할 수 있을까?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갈지어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새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9절부터 곡조?가 바뀐다. (찬양자에서) 예배자가 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 나라는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나라다. 이것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다. 하나님의 임재는 재판장으로서의 임재다. 하나님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신다.

교회 안과 밖에서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진실하심 새노래요 온 땅이 함께 불러야 할 노래다.

의와 진실함의 교회, 의와 진실함의 세상을 위해 노래(기도)하게 하소서

 

 

렘 20:7-18

사면초가 2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항우는 마지막임을 알고 부인 우희에게 ‘해하가’를 지어부른다.

산을 옮길 힘이 있고 세상을 덮을 기운이 있지만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항우의 애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 우희여 우희여 어찌할꼬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항우의 마지막은 평생의 여인 우희에 대한 염려였을까? 아니면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을까? 어찌할꼬 묻는다. 하여간 항우의 ‘해하가’에 우희 (우미인)은 ‘화항왕가’를 지어 답했다.

한나라 군인이 이미 땅을 침략해서 / 사방에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리네 / 대왕의 힘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 천한 첩이 어찌 살리요

우희는 답시를 다 부르고 칼로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다.

 

예레미야 심정에서 우희를 발견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앞에 사면 초가의 상황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상은 예레미야가 패역한 백성들의 조롱에 사면초가가 된 것이다.[10] 심지어 친구들까지 저들 편에 섰다. 오직하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좌절의 심정을 토해낼까? ‘어찌 살리요’ 항우나 우희보다 예레미아의 상황이 더 심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해야 하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참고 인내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 부끄러움이라는 조소를 [렘 20:18]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국도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후4:8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길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도 부끄러움을 너머 면류관을 본다.

나도 하나님을 바라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