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8:33-43

왕상 8:33-43

“만일 주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성전에서, 성전을 향하여 주께 기도 하며 간구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을 놓고 솔로몬은 기도한다. 이런 상황이란, 전쟁에 진 경우, 가물었을 때, 기근이나 전염병 등 재앙이나 질병이 있을 때 등이다. 솔로몬은 이런 상황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가정한다. 이 때 성전에서, 성전을 향하여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37]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38]  “주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39]

오늘 본문에서도 기도와 간구의 핵심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의 잘못도 이스라엘에 속한 각각의 개인의 잘못도 그 잘못에 따른 전쟁과 기근과 가뭄과 재앙과 질병이라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주의 해서 살펴야 할 것은 솔로몬의 기도는 전쟁과 기근과 가뭄과 재앙과 질병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종의 열매들이다. 기도의 열매가 아니다. 기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 때 돌이키게 해달라는 것이다. 은혜의 통로다.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40] 불순종에 대한 징계는 당연한 것이다. 순종에 대한 열매도 당연한 것이다.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주되시게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41]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도 벌이 없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돌이킬 기회가 없고 그대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어제 31,32절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도 기도는 내가 행한 대로 벌을 받는 것이고 벌을 받음으로 다시 순종의 길로 나갈 은혜를 입는 것이다. 결코 벌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다. 길을 돌이켜 순종의 길로 나간다면 질병이나 재앙이 멈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순종이 답이고, 만의 하나 순종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벌이 주어 지지만 기도로 순종할 힘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왕상 8:22-32

왕상 8:22-32

솔로몬이 하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자욱한 성전을 보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면서 기도합니다. 가장 먼저 신들의 신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이 아닌 하늘을 향해 기도한 이유는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아로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로리까”

온 우주보다도 크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하늘을 향해 손을 편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늘을 향해 손을 편다는 것은 허공을 향해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한 성전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주의 종이 이 곳을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옵소서”[29]

솔로몬 자신 뿐만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그 간구함을 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 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30]

기도는 찬양과 감사와 참회와 요청 등 여러 요소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일차적인 기능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앞에 나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첫번째 기도는 기도자격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 31,32절에서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 행위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고 하여서 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벌은 달게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부분은 나중에 더 묵상하고)

오늘 본문은 기도는 하늘의 하나님께, 성전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 첫번째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 역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할 권리가 있어야 하겠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기도할 자격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페이스북에 올린 다른 엔딩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 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왕상 8:30]

“용서해 주세요” 온 우주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땅에 세운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우리는 (솔로몬 때와 달리 성전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 대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기도에는 찬양, 감사, 회개, 중보, 간구 등 여러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 첫번째는 역시 “용서해 주세요”가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 모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자격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도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은 “용서해 주세요”다. 나의 찬양이, 나의 감사가, 나의 회개가 나의 중보가 나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나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 22:42 새번역]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다른 표현이다.

 

왕상 8:1-11

왕상 8:1-11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성전의 외내부 장식이 완성되었다고 하여서 역사를 마친 것은 아니었다. 다윗이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을 사관은 이렇게 표현했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7:2]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입주하는 절차가 남았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을 모았다. 제사장들은 궤를 메고, 레위 사람들은 성전의 기구들을 메고 성전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성전에 도착해서 궤를 안치하기 전에 성전 뜰에서) 솔로몬과 그곳에 모인 온 회중이 제사를 지냈다. 정해진 법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감격에 겨운 제사였던 것 같다. 제물의 수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다윗이 옷을 벗고 춤을 춘 것 같은 잔치의 제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언약궤를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았다. 언약궤를 운반하기 위해 꽂아 둔 채를 그냥 두었다고 한다. (사실 운반용 채는 더이상 필요없다.) 그리고 사관은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라고 덧붙인다.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4]

신약시대의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궤 안에 만나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어다고 기록하는데 사관은 왜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기록했을까?

두 사람 모두 언약궤를 열어 보았을리 만무다. 히브리서 기자는 언약궤 자체를 보았을리 없다. 그는 구약 성경을 근거로 히브리서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기자는 두 돌판을 넣은 언약궤와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함께 놓여 있었던 모세의 때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생명의 양식되시고 우주적 대 제사장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하여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상징을 이용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열왕기상 사관도 기록을 보고 썼을 것이다. 언약궤는 아무나 열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손을 댈 수 없어 채를 고리에 걸어 운반해야 한다. 그러니 모세를 제외 하면 궤를 열었을리 없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관은 성전의 주인이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 그것도 말씀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두 돌판,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언약을 맺을 때 모세가 넣은 것이라고 사관은 기록한다. 일종의 계약서다. 마치 집문서를 집안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고나 할까?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놓고 나올 때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했다. 제사장들은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한다.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을 상징한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에서는 제사장이라 하여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한다. 엎드리면 된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거나 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면 된다.

왕상 7:40-51

왕상 7:40-51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자신이 아무리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하였다고 하여도 누구와 어떤 일을 했느냐로 평가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사관을 통하여 히람이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되게 하셨다. 그가 놋으로 만든 모든 성전 기구들이 다시한번 열거된다.

역사의 현장에서 히람은 그렇게 돋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놋기구를 만드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마당이 아니었다. 솔로몬은 놋기구들을 속곳과 사르단 사이에 있는 요단 계곡에서 만들게 했다. 그곳에 차진 진흙이 있었기 때문이이라고 설명한다. 아마도 이 진흙으로 주형을 만들고 놋을 부어 기구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거기서 만든 기구들은 짐꾼들이 성전으로 옮겼을 것이다. 히람이 만든 놋기구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솔로몬이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사관은 기록하지만 단순히 수량만이 문제가 아니라 놋바다 같이 크기가 엄청나서 측량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솔로몬은 성전의 다른 기구들, 특별히 성소와 지성소에서 사용할 기구들도 만들었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다. 사관은 돌쩌귀 (문을 달기 위한 힌지(경첩))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솔로몬이 직접 만들었을리는 없고 히람이 만들었다는 언급도 없다. 그렇지만 성막을 만들때도 놋제단을 만든 브살렐이 아카시아나무로 언약궤를 만들고 순금으로 입혔듯이 히람이 금기구들도 놋기구와 함께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모든 공은 솔로몬에게 돌아간다. 그렇지만 사관은 다윗의 이름을 한번 더 언급한다.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

성전의 외형과 기구들은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가진 솔로몬의 주도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사관은 성전은 다윗의 마음에서 시작되었고 다윗이 미리 드린 물건을 성전에 두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 하나님께서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인정한 사람. 다윗. 그의 이름은 성전건축의 시작과 끝이다.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사람이 꼭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왕상 7:27-39 웨어러블

왕상 7:27-39

히람은 물두멍과 물두멍을 받치는 놋수레를 10쌍 만들었다. 히람이 만든 물두멍과 받침에 대한 양식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아마도 히람의 놋 일에 대한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잘 드러내는 성전 기구라고 사관은 생각하였을 것이다.

성막의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으로 가까이 갈 때 손과 발을 씻기 위한 물을 담아 두기 위해 만들어 졌다. (출 30:18-) 히람은 그에 따라 성전의 물두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출애굽기에 성막에서 사용되었던 물두멍의 크기와 갯수에 관한 기록은 없어 히람의 물두멍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성막을 지을 때도 물두멍과 그 받침을 놋쇠로 만들었다. 회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바친 놋거울을 녹여 만들었다.  // 자신들을 단장하는 것보다 제사장의 정결이 그만큼 중요했다.

사실 물두멍이나 받침이나 화려할 필요가 있는 성전 기구는 아니다. 오히려 실용적이어야 한다. 바퀴를 달았다는 것에서 그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오늘 날로 말하면 포터블이다. 달리 말하면 성전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정결해야 한다. 당연히 성령님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들도 언제 어디서나 정결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다는 것은 포터블을 너머 웨어러블 물두멍을 입는 것이다. 웨어러블 물두멍을 입고 살라고 바울이 권면한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1,2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