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1] 인구조사

[민 1] 인구조사

이백만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무리에서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세는 것은 쉬운 일일까? 하여간 셌더니 603550명이었다.

육십만대군. 대한민국 군인수가 육십오만정도 된다고 하니 비슷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예배군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은 근 400만 대군의 나라다.) 이정도면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전쟁은 머릿수가 곧 전투력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육십만 이라니. 쫓겨나온 이스라엘은 이 숫자에 놀랐을 것이다. 자신들을 오합지졸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인구조사한번으로 육십만 대군을 갖춘 민족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인구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육십만대군이다. 오합지졸이 일사분란한 대군이 된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54]에 답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여정을 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육십만대군도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쟁은 숫자싸움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역대하 20:15]

우리가 진정 의지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 3월부터는 민수기를 묵상한다. 본문이 길다. 세세히 살피기 보다 돋보기가 움직이는 곳만이라고 제대로 묵상했으면 좋겠다.

[요 14:25-31] 평안

[요 14:25-31] 평안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27a]

평안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평강, 평화, 화평으로도 번역된다. 바울 서신서에는 은혜와와 짝을 이룬다. grace and peace 는 서신의 첫머리 혹은 마지막 인사로 주로 쓰인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은 알 수 없는/ 세상은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그런데 이 평안이라는 단어을 곱씹어 볼수록 이 단어는 개인적인 평안보다 공동체적 화평을 드러내는 단어인 것 같다. ‘하나됨’이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 ‘너희’는 복수형이다. ) 평안은 예수님이 우리안에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기 때문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 (자녀들아) 하고 부르셨다.

은혜는 개인적으로 받을 지 몰라도 평안은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요 14:15-24] 또 다른 보혜사

[요 14:15-24] 또 다른 보혜사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21]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동의어다. 사랑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계명을 지키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다.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도 말씀을 듣기는 듣는다. 결국 차이는 행함이다. 이 행함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보혜사다. 사랑할 힘이 없으니깐, 계명을 지킬 힘이 우리에게 없으니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를 우리에게 주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문제는 세상은 보혜사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면 보혜사를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보혜사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보혜사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도마와 같이, 빌립처럼 ‘우리가 보혜사를 안다구요?’라는 우문을 하지 말자.그런데 오늘은 유다가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시는지?’ 우문을 던진다. 예수님의 현답은 ‘사랑’ 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와 함께 하실 이유가 없으시다.

또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수님도 보혜사셨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을 위해 간구하시는 보혜사시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이 삼위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천국백성의 삶이다. 이땅에서도 맛볼 수 있는 천국의 삶이다.

[요 14:1-14] 근심과 기도

[요 14:1-14] 근심과 기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근심’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심령이 괴로우셨을 때 [13:21], 십자가의 길을 놓고 마음이 괴로우셨을 때 [12:27],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에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을 때 [11:33] 사용된 단어다.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그분의 뜻을 밝히 드러내셨데도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 아니 내뜻과 다르면 외면한다.

도마가 그랬다. “내가 어디로 가는 지 그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라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밝히셨지만 도마는 모른다고 한다. 자신으로서는 그 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한자리 하고자 했던 욕심과 다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한번 천명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길은 세상 임금이 되는 길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빌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를 (성부 하나님을)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심은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의 충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순종시키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이구절은 “내 이름으로 누구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헬라어 ‘무엇이든지’는 ‘누구든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니 이 구절을 부적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부적처럼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내 욕심이 다르면) 근심하게 된다.  **전문가에게 물어본 결과 헬라어 문법상 본문대로 무엇이든지로 (중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누구든지(남성/여성)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문장의 주어가 ‘너희’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13절도 이렇게 재해석 된다. “성부하나님께서 나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도록 내가 행할 것이니 너희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도록 하여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 (누구든지 x 무엇이든지 o)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는 기도를 마칠 때마다 붙이는 후렴구가 아니다. 나는 기도할 때 지금도 하늘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롬 8:34] 예수님의 기도가 내 기도를 대체하길 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는 “예수님의 간구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란 뜻이다. 그러니 이 마지막 한구절이 내 간구의 핵심이다.

[요 13:31-38] 작은 자들아

[요 13:31-38] 작은 자들아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영광을 선포하신다. 십자가의 길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하고 제자들을 부르셨다.

‘작은 자들아’ 이 말은 ‘자녀들아’하고 부르는 단어와 같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권세를 주셨으니’[1:12] 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작은 자들’이다. 자녀들을 작다고 부르신 것은 아직 꼬맹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인 사건들이 영원하신 예수님께는 ‘이미’로 결정된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새계명을 주셨다. 새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추상적인 명령보다 좀 더 구체적이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계명이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고 그것을 따라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계명의 핵심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에 있다. 이 사랑은 죽기까지의 사랑이다. 새계명을 따르는 자가 얻는 것은 예수의 제자로 인정 받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로는 쉽다. 베드로도 ‘주를 위하여 내 목슴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당차게 도전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아셨다. 베드로가 세번 부인할 것을.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혈기왕성하게 맹세한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를 따르는 삶이다.) 사랑이 자주 실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주를 위하여도 생명을 내놓지 못하는 자가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릴 수 있을까?

‘작은 자들아 (자녀들아)’! 예수님은 이미 우리도 이렇게 부르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고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살자.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기 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기대한다. 이 사랑을 실천할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