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5 정의II

시편 85 정의II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13 새번역]

시편기자는 과거의 용서를 먼저 기억하며 노래한다.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덮어 주셨고, 그리고 노여움과 진노를 거두어 주셨다고 한다. [1-3] 그리고 과거에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다시 요청한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 주십시오.”[4] ‘다시’라는 단어는 지금 시편기자가 처한 상황이 포로 되었으며, 죄악가운데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진노가운데 있음을 드러낸다. 그의 간구는 노여움을 푸시고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5]

구원을 바라는 시편기자는 그 첫번째 이유를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이라고 노래한다.[6] 다시말해 백성의 기쁨을 위해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라고 한다. 두번째 이유는 주님의 속성인 ‘사랑’을 드러내 달라고 한다.[7] 시편기자는 구원이란 사람이 지음을 받은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라고 노래 하는 것이다.

시편기자의 간구는 하나의 서원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듣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겠으니 참된 평화를 달라고 한다. [8] 순종과 망령되이 행치 않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 주님의 영광이 깃들것이라고 노래한다.[9]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10]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11]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12]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13]

주님 앞에 앞서가도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다. 이땅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진실이 개인적인 정직이라면 정의는 공동체적인 정직이라고 이해하면 안될까? 스스로도 정직하고 (진실하고) 공동체도 정의롭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닐까? 주님께서 가실 길을 평탄게 하는 것이다.[13]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시편 84 정의

시편 84  – 정의

얼마전 목사인 후배가 유럽을 여행하며서 사진을 올렸다. 함께 가지 않았어도 파리, 피사, 베니스 등등의 도시는 알아 볼 수 있었다. 에펠탑, 사탑, 수로와 같이 확실한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한 사진때문이다.

하나님나라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시편기자는 주님이 거하시는 곳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노래를 시작한다.[1] 어떤 장면의 사진을 보았기에, 혹은 하나님나라에 대해 어떤 말을 들었기에 정말 가보고 싶어 마음의 병까지 얻게 되었을까? 그런데도 갈 수 없는 듯 하다.[2]

시편기자의 탄식은 새들도 하나님 가까이에 [3] 둥지를 트는데 자신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사랑스러움이나 하나님나라에서 주거의 안정이 아니라 주님 가까이서 항상 찬송하는 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4]

그러나 시편기자의 하나님나라에 당장 가지 못한다고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마음으로라도 하나님나라를 늘 꿈꾼다면, 언젠가 가게 될 것이라는 큰 소망을 얻은 복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복되다고 한다.[5] 소망을 얻은 자들은 고난 (눈물 골짜기) 가운데서도 도움을(복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6]  어쩌면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히려 힘을 더 얻고 마침내 하나님나라에 도착해 하나님 앞에 서는 더 큰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7]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신도 같은 꿈을 꾸며 기도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기도도 들어주소서.[8] 그도 하나님나라를 꿈군다. 단순히 개인만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 (아마도 나라의 통치자)도 살펴달라고 한다. 하나님만이 모든 어려움으로 부터 공동체를 지켜 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 방패라고 한다.[9]

주님과 사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하나님나라에서의 하루가 그 어떤 (좋은) 곳에서의 천날 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악인의 장막 (번듯한 집)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 경비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10]

시편기자가 꿈꾼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은혜와 영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덧붙인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다.”[11] 이런 만군의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12]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나님나라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가 복을 누리는 나라다.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다. 하나님을 믿으면 개인적인 복을 받는 나라가 결단코 아니다. 주께 의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손해보더라도 정직하게 행하게 해 달라고 의지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무엇을 구해야 할지는 자명해졌다. 누가는 이 좋은 것을 성령이라고 한다. 정직하게 행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하나님께서 정직하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오!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이땅에서 사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나라를 향한 고속도로가 있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정직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다. 하나님나라의 특색은 “정직하면 손해야”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시편 83 주인

시편 83 주인

시편기자는 주변의 여러 나라가 (무려 열 족속이) 이스라엘을 진멸시켜 이름도 다시는 기억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연합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적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면서 사사시대 때 (왕이 없었던 때)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자신들을 구원했던 역사를 기억한다. 사울이나 다윗왕을 기억하지 않고 왕이 없었던 사사시대를 기억하며 노래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신정을 향한 시편기자의 소원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18]라고 노래를 끝맺는다.

열 족속 연합군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다.[12]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은 외환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깨서는 마가복음 12장 1절에서 9절에 ‘포도원 주인’ 비유를 통해 내란을 말씀하셨다. (보통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하는데…)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막12:7]

예수님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라들에게 주리라.”로 마친다. (그리고 10-12절 부연 설명이 따른다.)

외환이나 내란 모두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시편기자도 주인은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였고 예수님도 ‘주’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난중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히 교회적 위기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인가?  그러나, 오히려 고난의 이유와 교회의 위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 포도원을 (하나님나라를) 내가 차지하려는 소견때문은 아닌지? 묻고 싶다.

패망직전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러나 결국 패망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여호와가 지존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가 주인되심을 믿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패망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자리에 없다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노래로 부르기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세상은 알기만 해도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주인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따른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시편 82

시편 82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대법관으로 이 세상을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하나님,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재판하여 주십시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8 새번역] 마치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과 무관하신 분인 것처럼 시편기자는 하소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재판하셨다.[1]

피의자는 신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틀림없다. 신들처럼 군림하는 세상의 권력자,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6] 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오히려 영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적용할 수 있다.

그들을 하늘 법정에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악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2] 그들에게 본래 주어진 임무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라.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3,4] 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었다. 그 결과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한마디로 (교회가 무너지니) 사회 기강이 무너진 것이다.[5]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음과 같이 판결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6,7] 한마디로 사형선고다.

그런데 8절에서 시편기자는 다시한번 재판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한번 더 기대보는 것일까? 아니면 사형선고를 받자 본연의 임무를 깨달은 것일까? 그것마저 아니라면 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믿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해 달라는 것일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27 새번역]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신들이라고 불러주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시편 81

[시81:8]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시81: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아삽의 시는 폐망한 이스라엘에게도 소망있음을 노래한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할 때 소망이 있다.

그래서 ‘들으라’, ‘듣기를 원하노라’라고 권면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듣지 아니하며’, ‘원하지 않음’이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 중 전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처방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는 여전히 듣기만 하여서 일까?

[시81:1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시편기자는 ‘들음’에 ‘행함’ ( 내도를 따르라)를 더한다. 예수님도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런데 여전히 어리석게 산다.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시81:15]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듣기만 하는 (어리석은)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없다. 제멋에 평생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아, 말씀을 읽어라.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라. 오늘도 주님의 ‘도’를 따르게 해 달라고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리라.

// 노래하리라. 후배 엠이 ‘ㄱㄷ’를 부탁할 때 ‘노래해 주세요’라고 쓴다.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 들으시는 노래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