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15:1-16] 같은 법도, 같은 규례

[민 15:1-16] 같은 법도 같은 규례

패잔병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2] ‘호르마’까지 (진멸 당하기까지) 패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책망이 아닌 새로운 소망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게 사십년이라는 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래도 소망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첫번째가 제사에 관한 법이었다.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제사로 하나님앞에 나가는 것이었다.

// 제사 법은 어렵다. 제사 종류와 제사 방법에 따른 이름들 그리고 각각의 제사가 갖는 의미들. 그래도 ‘포도주’가 제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심히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야)  적용해야 할 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그들과 함께 하는 이방인에게나 구분이 없었다. 유월절 규례와 마찬가지로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첫번째 유월절규례에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으면이라는 선행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선행조건도 없다. ( 두번째 민수기에서 지킨 유월절 규례에서부터 선행조건이 빠졌다.)

이방인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것이 법이 되었다. “너희가 하는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14]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15]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법전이 있었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는 대로, 즉 ‘본’이 있었다. (물론 법적용이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의미지만) 새로운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과 함께 솔선수범 자세가 요구되었다.

“같은 법도, 같은 규례”[16]  ‘같은 법  같은 판결’이라는 의미다. 법이 같으면 판결도 같아야 하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에 살고 있다. 같은 법인데 다른 판결을 하는 사회다. 믿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는 ‘같은 법도, 같은 규례’가 이루어 지는 나라다. 이 원칙을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하는 대로 이 세상 사람들도 그리할 것이다.’

사십년 광야의 여정의 첫번째로 새로운 땅에서 해야 할 제사법을 가르치신 이유는 무엇일까? 광야에서는 어떻게 지내라고. 아마도 불충분하지만 새로운 땅에서 지켜야 할 법들을 광야에서부터 미리미리 연습하라는 것은 아닐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미리미리 살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면 이 세상 사람들도 그리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민 14:36-45] 막무가내

[민 14:36-45] 막무가내

광야 길이 시작됩니다. 제일 먼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명의 정탐꾼이 하나님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습니다.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를 제외한 열지파는 사실 중요한 지휘관 한명씩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이제 앞으로 사십년 동안 하나씩 불신의 댓가를 치뤄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합니다.

백성들은 크게 슬퍼합니다만 또 다시 모세의 말을 자세히 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질 벌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사십년동안이라고 알려 주셨는데도 귀에 들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40]라는 엉뚱한 반응을 합니다. 이제라도 올라가면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42]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 올라가겠다고 막무가내로 행동합니다.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44]

하나님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44] 입니다. 아마도 갈렙과 여호수아가 지휘관이었던 유다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갈렙과 여호수아는 빠졌을 것입니다.) 행진할 때 가장 앞장섰던 유다지파가 빠지고 또 에브라임 지파가 빠졌다는 것은 지휘관 없이 올라갔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은 싸울 수 없습니다. 고지를 점령하기는 커녕 (산꼭대기로 올라가기 전에) 아말렉인과 산간지대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을 물리칩니다. 호르마까지 이르렀다고 부연합니다. 호르마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민수기21장 3절에도 한번 더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이번 전쟁의 패배가 전멸수준임을 암시합니다.

// 45절을 다시 쓰면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막무가내의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필경은 패배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로 하나님마저도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막무가내의 나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민 14:26-35] 하나같이 -> 하나씩

[민 14:26-35] 하나같이 ->하나씩

내일부터 광야의 여정이 다시 시작됩니다.[25] 이 여정은 뿌린대로 거두는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로 불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같이’ 죽이시는 심판은 거두셨습니다. 민족적 반역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20]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에 있는 ‘악’, 불신에 대해서 참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원망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원망한 대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8]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원망했습니까? 저들은 “…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2] 이라며 불평과 원망을 했었습니다.  “이/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육십만 대군 전부가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0]  아이러니하게도 처자가 사로잡힐까봐 두려워 했던 백성들에게 그들의 어린 자식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심히 아름다운 땅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육십만 대군은 광야에서 엎드려 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 회중의 반란에 모세와 아론이 회중앞에 엎드렸습니다.[5]  회중앞에 목숨을 내 놓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역전이 되어 이제 회중들이 광야에서 엎드려지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죄악은 자식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불순종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 질 때까지 사십년 방황하게 됩니다. 정탐한 날 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년 동안 죄의 댓가를 치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면 이렇게 됩니다.[34]

// 방황이란 단어는 가축들이 풀을 뜯으며 다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방황에 필요한 것이 목자입니다. 목자의 미움을 받으면 소멸되기까지 방황하게 되고 목자의 사랑을 받으면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하나같이’ 진멸 당하는 것은 면했지만 결국 ‘하나씩’ 뿌린대로 그 댓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씩’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하나같이’ (공동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같/이

[민 14:11-25] ‘큰’ 권능

[민 14:11-25] ‘큰’ 권능

온 회중이 돌을 들어 갈렙과 여호수아를 치려고 할 때[10] 하나님께서는 회막에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순간적으로 자세가 바뀝니다. 온 회중은 엎드렸을 것이고 모세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나”[11]

멸시의 원인은 불신입니다. 불신의 댓가는 진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백성을 다스리실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 순종의 대표인 모세에게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은 모세만 들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엎드린 회중에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진동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모세는 중보합니다. 그런데 그 첫번째 내용이 제가 보기에는 정말로 생뚱합니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5, 16] 과연 그럴까요?

죽이는 것으로는 생명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어진 나라들도 죽이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8) 그러나 살리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라고 중보합니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관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19] 모세가 중보한 근거는 주의 인자의 관대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았습니다.

// 죽이는 것이 ‘작은’ 권능이라면 살리는 것은 ‘큰’ 권능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한편으로는 불신에 대한 심판도 내리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심히 아름다운 땅’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길을 다시 광야로 돌립니다.

[민 14:1-10] 심히 아름다운 땅

[민 14:1-10] 심히 아름다운 땅

가나안땅 설명회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온 회중이 밤새도록 대성통곡합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리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급기야 원망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향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서로를 선동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와 아론은 온 회중 앞에 엎드렸습니다. 회중들에게는 리더쉽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께 모든 처분을 맡긴다는 자세입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회중앞에 다시 섭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드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리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7-9]

// 가나안 땅을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시작합니다. 뭍혀있는 보화를 발견했고, 값 비싼 진주를 찾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짧지만 강렬한 연설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곧장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그 땅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데 그땅 백성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 땅 사람들이 오히려 먹이감이고 그 땅을 보호하던 신들도 이미 떠났다고 합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니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성통곡을 하는 온 회중의 귀는 이미 막혔습니다. 두려움에 그냥 돌을 듭니다. 저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원망에 휩싸여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고 합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1,32]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땅을 살려고 하면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온 회중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10:2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니 약 600,000:2가 맞겠죠)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적은 무리에 속하고 싶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따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