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선교 2

선교사/지를 위한 기도는 단기선교의 좋은 훈련이다.

선교훈련 중 단기선교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훈련이다. 그래서 가족여행을 선교여행의 기회로 삼아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저비용 고효율의 선교훈련이 있으니 바로 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잠중의 초기 파송선교사들은 저를 비롯하여 서정실, 박선길, 박은미, 정일권, 고영호로 이어지기까지 모두 청년부 선교기도모임팀 출신들이다. 단기선교여행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한 곳밖에 돌아보지 못하지만 선교기도모임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오는 선교기도편지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어서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선교의 다양성을 접할 수 있어 장점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교사 후보생이라면 다양한 선교현장에 대한 이야기와 기도제목은 자신에게 적합한 선교의 길을 발견하고 구체적인 훈련을 받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990년대 초 잠중 청년부에도 선교의 봄이 왔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교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구제에 관심이 많았고,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구제활동을 했다고 말했었다. 한편으로 선교에 관심있는 청년들도 많았다. 당시 청년부들은 주일 봉사, 주일 예배 참석, 청년부 모임 참석, 저녁 예배 참석으로 주일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선교기도모임은 청년부모임과 저녁예배 사이에 있었다. 어쩌면 저는 저녁예배를 기다리는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선교기도모임에 참석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선교기도모임은 요약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편지를 쭉 읽고 기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요약된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현장감이 있어 좋았다. 연변과학기술대한 전신인 기술학교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던 서울영동교회 정현구 목사님의 소식은 매번 주옥 같은 수필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제가 연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람이 부족해 빗자루를 들 사람도 없다는 기도편지에 대한 반응이었다. 해외 봉사활동을 꿈꾸던 저는 교회개척은 몰라도 빗자루를 들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단기선교 준비도 선교사/선교지를 위한 중보기도로 시작하자. 마음이 있어야 투자할 수 있고, 시간을 투자해야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선교지를 위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면 좋겠다. 잠중을 방문하시는 선교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질의 후원보다 기도후원이 중단되지 않기를 요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단기선교 1

선교의 기회가 아니라 선교지에 대해 배우는 기회다

선교에 관심있는 성도라면 단기선교를 한두번 꿈꾼다. 아니 단기선교의 경험이 이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현장에서는 단기선교를 어떻게 볼까? 물론 선교지마다 다르다.

[제가 현장에 있을 때, 제가 있는 현장에 잠중에서 단기선교팀이 오고싶다고 말하면 ‘선교’라는 생각을 접고 그냥 놀러오라고 말하곤 했다. 성령의 역사를 감히 제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교는 이미 단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기팀의 방문은 선교적이기는 하지만 선교지탐방이나 봉사활동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신나게 놀고 갈 때, 현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기선교팀의 입장에서는 그냥 놀러간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아무리 적어도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원받아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기선교라고 쓰고 실제 프로그램은 탐방이나 봉사활동으로 꾸미는 것이 좋고, 많은 프로그램보다는 자유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제가 마지막으로 사역한 캄보디아에 단기팀이 왔다고 하자. 단기팀은 현지에서 터를 닦아 사역하시는 선교현장만 둘러보고 가게 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캄보디아 전체를 특정 선교현장과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일반 사람을 만나볼 기회도 없다. 언어도 안 되니 선교사와 선교사를 돕는 전도인들하고만 교제하게 된다. 그러면 캄보디아의 민낯을 볼 수 없다. 복음의 능력을 프로젝트로, 혹은 돈이 필요한 사역으로 느끼게 해 줄 뿐이다. 물론 단기선교팀을 밝히는 선교사들도 있다. 자신들의 선교사역에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단기선교팀이 들고오는 돈주머니 때문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면 단기선교팀은 어떻게 꾸리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기본적으로 현지 선교사의 요청이 있을 경우 그에 맞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면 가족여행을 소위 단기선교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단기선교팀이 방문하는 지역은 우리나라보다 개발이 늦은 가난한 나라들이다. 따라서 선교지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교지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등한 나라로 보는 색안경은 선교에서 있어서 가장 위험하다. 다름을 열등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색안경을 쓰는 순간, 복음은 선교지 사람들에게 섬김이 아니라 군림의 이미지로 다가간다.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우리나라만 선교가 성공? 했을까? 개인적으로 1907년 평양 대부흥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평양 대부흥은 1903년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각성을 기반으로 한다. 원산에서 여자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에 강사로 초청된 하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국인들의 각성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각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이 죄를 먼저 회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렇게 성령께서 선교사들이 쓰고 있던 색안경을 벗겨 주셨기 때문에 한국인 전도자들을 동등한 동역자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복음에 대해 옥토가 되었다.

아직도 많은 선교지에서 선교사와 현지인 도우미들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오는 단기선교는 이런 착시를 고착화 시키는 위험성이 있다. 이제 우리는 단기선교를 선교가 아니라 학습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단기선교를 꿈꾸는가? 가족여행을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님이 계신 곳으로 정하면 좋겠다.

건강한 성도는 이미 보내는 선교사다

건강한 성도는 이미 보내는 선교사다

한국을 방문하면 가끔 선교사를 꿈꾸는 청년들을 만난다. 그들은 선교사로 어던 준비를 하면 좋은지 묻는다. 그러면 저는 항상 교회생활을 잘하라고 조언한다. 교회에 속한 다양한 성도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교제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5년 이상 교회를 섬기다가 나가면 좋겠다고 권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급하지 않다고 말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지만 말이다.] 선교현장에 있으면서 종종 선교후원이 끊어지는 선교사들을 본다. 대부분 후원교회의 담임목사가 바뀌거나, 큰 교회의 경우에는 선교담당 교역자나 장로가 바뀌면서 발생한다. 우리 정서상 교회 안에서도 인맥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요셉을 모르는 바로와 같이 선교사를 모르는 담임목사나 선교담당자들은 현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잠중의 경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담임목사가 자주 바뀌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어느 분이 그 동안 올림픽 때마다 담임목사가 바뀌었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하셨다. 감사하게도 저희 가족에 대한 후원은 아무 변화없이 지속되었다. 물론 잠중이 파송한 다른 선교사님들에 대해서도 후원이 중단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 잠중이 건전한 교회라는 방증이다.

우리 가정은 물질과 기도의 후원뿐 아니라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2008년 안식년 때는 잠중에 선교관이 없으니 10개월 짜리 전세집을 얻어주셨다. 2년 단위로 전세를 계약하는 한국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전세집에 필요한 살림도 채워주셨다. 교회이름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신앙의 선배와 후배들 덕분이었다. 우리 가정 이후로 안식년으로 한국에 들어왔던 가정이 또 있었지만 우리와 같은 혜택?을 누리지는 못했다. 후배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개인적으로 잠중에서 파송받기까지 꼬박 10년을 잠중에서 섬기면서 신앙의 선후배들과 교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제가 선교사 후보생들에게 가급적이면 오래오래 교제하고 파송받으라고 권면하는 이유다. 그러나 첫 10년이 평생의 후원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2008년 안식년은 그래서 또 다른 교제의 시작이었다. 15년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 싱글 때 교제하던 청년들은 아비와 어미가 되면서, 또 직장을 따라 교회를 떠났고 중직자들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2008년 안식년은 기존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곤고히 다지고, 새로운 성도들과 교제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주일학교 때 가르쳤던 학생들이 아비와 어미가 되어 교회가 섬기고 있었다. 이들이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형제자매와 부모가 더 많아진 셈이었다. 풍성하고 다양한 성도의 교제는 교회가 건전하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제가 건전한 성도들을 만난 것은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다양한 성도들과 부딪히면서 모난 부분이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육신의 부모를 일찍 잃었다. 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두 분이 별세하셧다. 그러나 예수 믿고 수 많은 가족을 얻었다. 부모가 없으니 아내에게는 시댁이 없다. 그러나 아내는 잠중을 방문할 때마다 시댁에 방문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잠중에 늘 고마울 따름이다.]

저는 제가 건전한 성도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건정한 성도들과의 연합을 통해 건전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도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동역자들 사이와 현지인들과도 화평해야 한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교제할 수는 없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폭넓은 신앙의 교제는 현지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성도가 교회에서 선교사 후보생과 교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선교사 후보생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보다 더 좋은 선교훈련은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 후보생과 교제하고, 선교사들과 기도편지로 교제하는 성도는 이미 보내는 선교사다.  

건전한 성도가 좋은 선교사 후보다

성도=선교사

199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교회도 전문인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자비량 선교’라는 말도 회자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전통적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창의적접근지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 늘었다. 창의적접근지역이란 선교사의 비자발급, 복음에 대한 거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있어 선교사의 안전이 위협받는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는 좀더 전문적이고 창의적인 선교가 요청된다. 이런 지역에는 전통적 목회자 선교사보다는 의사 교사 사업가가 더 효과적인 선교를 할 수 있다. 물론 창의적접근지역에 전통적 선교사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선교사 신분으로는 접근조차 어렵다. 이전에는 전문인이 선교를 위해서 신학적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면, 이제는 목사가 창의적 접근을 위해 전문인으로 훈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제가 1992년 처음 평신도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정하고 정주채 목사님을 면담했을 때, 정목사님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먼저 되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목회자 소명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당시 저는 평신도/선/교/사 보다는 /평/신/도/선교사 라는 정체성이 강했습니다. 일개 연구원이었던 저는 /전/문/인/선교사 라는 타이틀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오히려 경계를 넘어서도 성도 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교사를 돕는 보조선교사로 자처했습니다. 당시 허영근 집사님 가정과 서정실 선교사와 함께 우리는 /선/교/사/가 아닌 /평/신/도/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제게는 큰 위로가 되는 표현입니다.]

사실 평신도라는 표현은 그리 성경적이지 못하다. 교회 안에 계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냥 ‘성도’라는 단어를 제일 좋아한다.

선교현장에 나가면 한국인 평신도 선교사는 한인 선교사들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쉽지 않다. 신학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성례를 집행할 자격도 운운되기 때문이다. 전문인 선교사 중에서 그나마 의사 정도가 인정을 받는다. 육신의 생명이지만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전문인선교사들이 모여있는 대학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 선교사들과의 차별을 그렇게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인 선교사들이 방학과 안식년을 이용해서 결국 목사 선교사로 탈바꿈했다.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선교사 사회에도 계급이 있는듯해 보여 아쉬운 대목이다. 선교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된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은 우리보다 차별이 없어 보였다. 선교사 자녀 교육만을 위해서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기도 한다.

[결혼 후 저도 2년동안 선교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장기 사역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못다한 선교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선교사란 경계를 넘어 성도로 보냄을 받은 자다. 선교사 앞에 붙는 목사, 전문인, 의사, 평신도 등등의 구별은 큰 의미가 없다.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를 넘어서도 성도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듯, 본국에서 성도로서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경계를 넘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결국 좋은(건전한) 성도가 좋은(바른) 선교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