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30-44

30-33 // 사도들이, 곧 둘씩 파송받은 자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고에 관심 없으셨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사 잠깐이라도 쉬라고 하셨다. 제자들의 사역도 예수님처럼 쉴새없고 밥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바빠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는 모든 고을에서 온 무리들도 예수님 일행을 놓치지 않고 해안을 따라서라도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으로 달려갔다. 심지어 예수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말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위에서라도 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4-44 // 제자들과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예수님은 큰 무리에게 나오셨다. 큰 무리는 목자 없는 양 같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다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나오셨다고 시작한다.) 때가 저물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고 날도 저물어 가니 가르치시기를 그치시고 무리들을 보내어 근처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다 먹이려면 이백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나 가서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본 결과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있다고 보고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히라고 하셨다. 무리가 백명씩 오십 떼 혹은 오십명씩 백 떼로 나눠 앉았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에게 나눠주게 하셨다. 물고기 두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다.

>> 요한의 죽음과 장사를 언급한 후 첫번째 표적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늘 사건이다. 회개에서 하나님나라의 선포로 패러다임이 넘어왔다고 선언했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는 42절 “다 배불리 먹고” 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하나님나라가 선포되었지만 모두가 복음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더러운 귀신 들리자들은 축귀를 병에 결린 자들은 치유를 맛보았지만 더러는 길가요, 더러는 돌밭이요 더러는 가시떨기요 적은 무리만 좋은 땅이었다. 그런데 오늘 하루만은 모두 다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다 배불리 먹었다. 이전까지 오병이어 기적을 읽으면 꼭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를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다 배불리 먹었구나, 모두 만족했구나에 관심이 쏠린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일부가 아니라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은 더이상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의와 평강과 희락을 뜻한다고 생각된다.

>> 과정은 모르지만, 어떻게 가능했지라는 질문을 뒤로하고 ‘다 배불리 먹었다’ 라는 이 짧은 한구절에서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발견한다. 다 앉아서 먹었다. 배불리 먹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다. 수고한 댓가에 따라  많이 먹거나 적게 먹지 않았다. 밥을 먹을 겨를 도 없었던 제자들이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식탁을 오가면서 수종을 들었다. 예수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제자들이 먼저 먹는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밥먹을 겨를이 없어도 배고픈 자들을 먼저 섬겨야 하는 나라다. 이 들까지 오는 배에서 예수님은 쉬지도 못하고 먹을 겨를도 없었던 제자들을 쉬게 하시며 먹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제자들은 더 큰 무리를 대상으로 섬김의 제자도를 실습한다.

>>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를 보내어 저들로 각자 끼니를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때 속 마음에는 배를 타고 오면서 경험한 예수님과의 한적한 곳에서의 식사 시간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무리들을 피해 배 위에서 예수님과의 은밀한 시간을 통해 쉬고 먹고하지 않았을까? 물론 배부르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 같은 무리를 위해 제자들에게 이 한적한 시간까지도 희생하게 하셨다. 성도들 중에 코로나 19 최전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희생을 경험하실 것이다. 주일 예배의 기쁨을  희생하며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영적예베를 드리는 모든 분들께 경의를 표하게 되는 아침이다.

마가복음 6:14-29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고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자)

14-16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 이 소문은 헤롯왕에게도 들렸다. 헤롯 왕은 예수의 소식에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요한의 능력이 예수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엘리야, 또 어떤 이는 선지자라고 말했으나, 헤롯은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 살아났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17-28 (헤롯이 요한을 죽이다.)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자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헤롯은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는 아내 헤로디아의 바가지에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가두었지만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고 요한의 말에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의 생일잔칫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었는데 춤에 취한 나머지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했다. 딸은 헤로디아에게 물었고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사주했다. 헤로디아 딸은 헤롯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했고 헤롯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맹세를 인하여 거절하지 못했다. 헤롯은 결국 시위병을 보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했고 그 시위병은 요한을 목베어 가져왔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다.

// 의롭고 거룩한 요한은 허무하게 죽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시체를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장사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요한복음 3장 30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새번역) 죽은 요한의 입장은 어땠을까? 요한은 목이 잘리면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이미 세례 요한이 죽었지만 헤롯왕의 태도를 보면 세상은 예수님에게서 요한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체가 예수님이시고 요한이 그림자였는데 갈릴리 변방의 예수님은 여전히 요한에게 가려져 있었다. 마가는 요한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함으로써 유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요한의 레가시를 지워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요한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에서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패러다임이 이동했음을 독자들에게 고지한다.

>> 요한의 회개의 복음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전통과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쉽지 않다. 더러운 것을 벗어 버리는 것은 쉽지만 깨끗한 것을 입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더러운 것을 벗어 버리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 새로운 것을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적용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표현한다. 회개는 시작이다. 나머지 반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얗게 빛나는 하나님나라의 유니폼을 입고 사는 것이다.

>>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 내가 죽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라고 하신다. 세상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을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6:1-13

1-6a예수님은 고향으로 가셨다. 열두 제자가 따랐다. 아마도 더 많은 제자들이 따랐을 것이다. 고향에 오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회중들의 첫 반응은 놀람이었다. 예수가 어디서 이런 것을 (회당에서 가르칠 자격을) 얻었느냐? 예수의 가르침과 권능들이 어찌됨인지 놀랐다. 그러나 곧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않느냐? 라며 예수를 배척했다. 예수님은 회중들에게 선지자가 고향 친척 자기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몇몇 소수의 병자에게만 안수하시고 고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다른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 분명 금의환향이다. 장원급제를 해서 가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오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열두명의 제자와 함께 암행어사처럼 방문하신 것이다. 행색이 초라해도 암행어사가 아닌가? 예수님은 고향에서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지만 그만큼 어느 신학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축귀와 치유의 은사는 어찌됨인지? 등등 의구심은 증폭되었고 결국 고향사람들은 인간 예수를 배척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옛 소문, 열두살 때 성전에 올라갔다가 가출소동을 벌였던 말썽꾸러기에 대한 기억,  요셉을 도와 목수일을 하던, 만약 요셉이 일찍 죽었다면 장자로 소년?가장이었을 예수가 그들이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 랍비교육을 받지도 않은 예수가 랍비라고 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가르침과 능력을 보면 놀랍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믿음있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만 치유함을 받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어제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면서 치유가, 곧 구원은 믿음의 문제라고 하셨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아니라서 마패를 꺼내 암행어사 출두를 선어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6b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자)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7-13 예수님은 곳곳의 필요을 보셨다. 이에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게 하셨다.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러 가기위해 지팡이 외에는 따로 양식이나 배낭이나 심지어 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신만 신고 여분의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다. 영접하는 집에서 머물고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가라고 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고 전파하고 축귀하고 많은 병자들을 기름을 발라 고쳐주었다.

//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던 예수님 방식 그대로 제자들을 보내셨다. 단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물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하나님과 짝을 지어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을 것이다. 축귀의 권능으로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도 목자들 처럼 지팡이 하나 들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따로 양식이나 배낭이나 돈을 가지고 다니셨다는 기록도 없다. 당연히 여분의 옷도 입고 다니시지 않으셨다. 영접하는 시몬의 장모의 집과 세리 레위의 집에서 머무셨다. 그러나 거라사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곳에서는머무시지 않고 복음의 씨만 뿌리고 먼지를 떨어버리고 배를 다시 타시고 돌아오셨다. 이렇게 제자들도 둘씩 짝을 지어나가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기름을 발라 병자를 고쳤다는 표현에서 야고보서 5장 14절이 떠오른다.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병자를 위하여 기도해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쳤다는 번역보다 돌봤다는 번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리브 기름을 부어 병자를 돌보았다.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 고향사람들은 자기 지혜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마을들로 가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요 오늘 날에도 성도들에게 선교적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다.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어느정도 말씀을 배워야 하고, 축귀도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병자들을 위해 기름을 붓고 돌보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기름을 붓는 다는 것은 나의 소유를 사용하는 것이요 돌보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의 사역은 참 간단했다. 복음을 하나님나라를 비유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라’라는 복음의 시작점에 집중했고, 받은 축귀의 권능으로 많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냈으며 기름을 발라 많은 병자들을 돌보았다. 씨를 뿌렸다. … 하루종일 곱씹어 봐야겠다.

마가복음 5:21-43

21-24 예수님은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겼다. 큰 무리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때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예수 발 아래 엎드려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오셔서 안수해서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고 간곡히 구했다.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가셨고 큰 무리라 예수님을 에워싸 밀치며 따라갔다.

25-34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자가 예수를 에워싸며 따라가는 무리 중에 있었다.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면 구원을 받을까 생각하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그즉시 그 여자는 병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도 그 능력이 자시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를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무리가 서로 밀쳐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바라보셨다. 여자는 이실직고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

35-43 아직 야이로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으니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만 데리고 회당장 집으로 가셨다. 회당장 집은 울음바다였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자 그들은 비웃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보내시고 부모와 세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있는 곳에 들어가서 달리다굼 하셨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많이 경계하신후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다.

//  열두살 소녀와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구원을 받았다. 마가는 예수님의 두 치유 사건을 기록하면서 굳이 ‘고치다(치유)’ 라는 단어 대신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니 예수님이 고침을 구원이라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과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이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은 여인에게는 맞장구쳐 주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혈루증을 앓은 여자는 치유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의 치유가 두려워할 것이 아닌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 두 딸. 회당장의 어린 딸과 예수님의 딸. 회당장의 어린 딸은 갑자기 아팠다기보다 태어나면서부터 아프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태어나면서 병약하게 태어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되었을 것이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12년 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듯이 야이로도딸의 치료를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 다녔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야이로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넉넉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가난한 과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그 여인이 밝은 얼굴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회당장은 자기의 어린 딸을 생각했을 것이다. 야이로는 여인이 자신의 급한 길을 막는다는 생각보다 자기 딸로 낫게 되는 희망이 솟았을 것이다.

// (그러나) 희망은 잠시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말 그대로 복음이다.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던 여인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소망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잠시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소식으로 깜깜해질 것이다. 예수님은 마치 그 때를 미리 교훈하시는 듯 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님을 향해 스스로나 구원하라고  비웃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성부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었다. 잠잠하라고 하셨다.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 난 것은 굳이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굳이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경계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교훈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땅 중의 좋은 땅이었다.

>> 그냥 성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보게 되는 아침이다.

마가복음 5:1-20

1-2 (배경/무대)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반대편 거라사인 지방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시는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난다. // 예수님이 건너가고자 한 곳이 돼지치는 이방인들이 많은 곳이었다면 제자들이 싫어했을 법도 했겠다. 게다가 갈릴리 바다를 가로지르는 동안 광풍까지 일어나고 더군다나 처음 맞아주는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이니. 그것도 귀신 이천명이 달라붙은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나라 복음이 침노할 수 있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보이는 그런 곳으로 예수님은 오셨던 것이다.

3-13 (사건) 무덤이 이 사람이 사는 거처로 사람들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쇠사슬로도 제어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셌다. 이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는 무덤 사이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돌로 자해하는 것 뿐이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께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정작 말을 한 것은 이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괴롭히지 마소서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무더기)라고 대답했다. 더러운 귀신은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다가 차라리 근처 산 곁에 있는 돼지 무리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갔고 귀신들린 돼지 떼 거의2천마리는 바다를 향하여 내리 달려 바다에서 몰사했다. // 귀신들린 자의 행색을 보면 귀신이란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신 자체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정도로 높은? 영적 수준을 갖추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이라고 해서 다 선한 (좋은, 하나님의 형상) 것은 아니다. 악한 영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예수님 앞에 달려나왔다. 군대 귀신은 여전히 무리지어 그 지역을 좌지우지 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과 달리 한 군단이나 되는 귀신무리라고 해도 돼지무리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였다. 결국 그들의 바람과 달리 귀신들은 돼지들과 함께 바다에 몰사하고 만다.

14-20 (반응) 돼지를 치던 자들이 도망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하자 마을 사람들이 확인하러 보러왔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도) 여전히 두려워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과 돼지에게 일어난 일들을 마을 사람에게 알리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에게 알리라 하셨다. 귀신 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 지역에 전파했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다. // 예수님과 군대귀신의 만남을 지켜보던 사람은 어땠을까? 이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귀신 들렸던 사람 밖에는 안보였을 것이다. 영적인 존재인 귀신이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수많은 영적 존재들에 사로잡혀 지나가던 사람들을 해치고 자기 자신을 해하던 그 사람은 옷을 입고 정상적이 되었고,  대신 주변에서 치던 2천마리에 가까운 돼지들이  몰살된 현장을 지켜봐야 했다. 돼지치기들에게 이소식을 듣고 놀란 주변 마을 사람들이 뛰어 나와 이 사실을 확인했다. 거라사 사람들은 변화된 한 사람을 보았지만 이천마리에 가까운 몰살한 돼지 값만 생각했을 것이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아무리 해가 되었어도 돼지 이천마리 값보다 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귀신보다 더 강력한 맘몬신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배척한다.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바라나 예수님은 주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신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고 그는 순종했다. 그의 전파에 데가볼리 사람들까지도 놀랍게 여겼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귀신들린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다시한번 물리적 임마누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누리는 자가 곧 임마누엘을 누리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 갈릴리 반대편 어둠(묘지) 가운데 거하던 무더기 귀신들린 자는 갈릴리를 휩쓸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복음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가 축귀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느날 밤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일었다 잔잔해 졌을 때 무더기 귀신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알고는 무더기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로 개편해 맞서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대적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재빨리 예수님께 서 본토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화친을 맺자고 달려갔다. 제발 이동네만은 제가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래서 군대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군대 귀신은 하는 수 없이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서 그 지방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허락하셨다. 군대 귀신은 어리석게도 돼지 떼는 자신의 영향아래 가둘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제 꾀에 빠져 돼지와 함께 바다에 빠져 몰살되고 만다. 그런데 그 지역 군대 귀신보다 더 쎈 우상이 있었다. (돼지가 몰살되자 군대귀신이 돈귀신이 되었을 수도 ㅎㅎ) 돈신이었다. 그 지방 여러 마을 사람들은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긴 예수님을 배척했다. 오늘날 같으면 집단 소송을 했을 것이나, 당시에는 집단 소송을 부추길 변호사들이 없었다. 물론 현대법으로 집단 소송을 했다고 해도 예수님께 승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은 손해라도 다시 그같은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 보낸다. 예수님은 아마 신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배를 다시 타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멀어져 가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한 그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을 것이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그 땅에도 좋은 땅이 있었다. 씨가 뿌려졌다.

^^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