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3:11-22

열왕기상 13:11-22

//베델 제단에서 여로보암과 제단에 일어난 일은 목격자들이 있었다. 늙은 예언자의 아들은 여로보암이 임의로 세운 제사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버지에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얘기 했다.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은 예언자라는 뜻이겠지만, 예언을 한지 오래되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아들의 증언은 이 늙은 예언자에게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예언자가 아니지 않을까? //늙은 예언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가 만난다. 하나님의 사람은 느티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다. 유다(예루살렘)과 베델은 16킬로 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길이 굽이굽이 휘었다면 거리는 하프마라톤 정도 되었을 것이다. 걸어서 세네시간은 걸린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 피곤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순종의 결과가 항상 기쁨인 것은 아니다. //늙은 예언자가 거짓말까지 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불러 먹고 마시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결국 늙은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늙은 예언자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던 길을 되돌아 왔을 뿐 아니라 먹고 마셨으니 죽어서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늙은 예언자의 예언의 욕심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을 죽음에 몰아 넣는다. //확실한 명령이 있는데도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속아넘어갔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또 암송까지 하며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나 자신의 생각을 더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누락시며 적용하는 나의 삶을 돌아본다. 한국교회가 순종보다 평안만을 떠들어 대는 그럴싸한 거짓 설교에 속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늙은 예언자들, 늙은 설교자들을 주의하자. 단순히 나이가 많은 종교지도자들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없이 기존의 교리에 갇혀 사람의 말을 하는 종교사기꾼들을 조심해야 한다. 결국 스스로가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되어야 한다.

열왕기상 13:1-10

열왕기상 13:1-10

여로보암이 베델 제단에서 분향을 하려고 할 때, 하느님의 사람이 야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유다로부터 베델로 왔다. 하느님의 사람이 제단을 바라보며 다윗의 가문에서 요시야란 한 아들이 태어나서 베델 제단 위에 분향하는 산당의 사제들을 죽여 그 뼈를 베델 제단 위에서 태우겠다고 야훼께 받은 말씀을 외쳤다. 하느님의 사람은 야훼께 말씀을 받은 증거로 제단이 산산조각 나고 그 위에 있는 잿가루가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로보암은 하느님의 사람을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의 손이 곧 마비되어 오므릴 수 없게 되었다. 곧 이어서 하느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제단이 산산조각 나고 제단 위에 있던 재가 쏟아졌다. 여로보암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야훼 하느님의 은총을 빌어 자기 손이 다시 회복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애걸했다. 하느님의 사람이 야훼께 기도하자 여로보암의 손이 즉시 나았다. 여로보암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식사와 선물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람은 왕실 재산 절반을 준다해도 왕의 궁전에는 가지 않고 식사는 물론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말했다. 야훼께서 식사하거나 물을 마시지 말고 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는 하느님 말씀대로 베델로 올 때 왔던 길과 다른 길로 돌아갔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06/

열왕기상 13:1-10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여로보암과 유혹을 물리친 하나님의 사람이 비교된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다 손이 마르고 말았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손을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부탁했고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 여로보암 손 낫기를 구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로보암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자비하시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구해야 했던 것은 마른 손의 회복보다 완악한 마음의 회복이어야 했다. 마른 손을 잘라 버리고서라도 다윗의 길을 가기 위해 회개해야 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몰랐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식사와 선물로 보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감사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했다. 감사하다면 다윗의 길로 돌이키겠다고 회개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에게 그 어떠한 댓가를 받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예루살렘에서 베델은 10마일 정도라고 한다. 하프 마라톤보다도 짧다. 그래도 보통 사람에게는 편도 세네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이 길을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갔다 오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상한 분이실까? 그러나 하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열왕기상 12:25-33

열왕기상 12:25-33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을 수축하고 후에 브누엘로 옮겼다. 여로보암은 나라가 다윗의 왕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야훼의 전에 제사하러 올라가다 마음이 유다왕 르호보암에게 쏠리게 되면 자신을 죽이고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베델과 단에 두고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신이 여기 있으니 번거롭게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올라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제사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예배하는 죄를 지었다. 왕은 또 언덕세 산당을 짓고 레위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사제를 임명했다. 여로보암은 또 금송아지에게 제물을 드리는 순례절도 임으로 만들고 사제들을 임명했다. 여로보암은 자기 마음대로 정한 순례일(제팔월 십오일)에 베델의 제단에 올라가 친히 분향제를 드렸다.

열왕기상 12:25-33

//다윗의 길! 여로보암도 다윗 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면 여로보암의 왕좌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자기를 떠나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여로보암은 어떻게 하면 다윗의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대신, 백성들이 자기를 떠나 르호보암에게 가면 어쩔까 하는 세상 근심을 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외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이라고 가르친다.) 돌이켜 보면 여로보암은 세상 근심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세상 근심이 언약에 대한 불신을 불러온다. 반대로 세상 근심을 지울 수 있는 것이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언약에 대한 불신이 우상을 만들게 한다. 여로보암에게는 금송아지였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출애굽 하자마자 범했던 죄 그대로다. 한 마디로 역사를 잊었다는 증거다. 역사도 잊고 말씀/율법도 잊어버리니 제사장도 절기도 맘대로 정하고 만다.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은 이미 나락에 떨어졌다는 방증이다.ㅠㅠ 이 시대의 금송아지는 무엇일까? 돈, 학력, 권세, 명예 등등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다. 스스로가 제사장 되고 스스로가 절기를 만들어 지키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는 꼴이다. 확실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여로보암의 길을 간다. 나락으로 떨어진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지옥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05/

열왕기상 12:12-24

열왕기상 12:12-24

사흘후 세겜에서 르호보암은 여로보암과 온 백성 앞에 섰다.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끝내 외면하고 가혹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했다. 르호보암이 끝내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사관은 주님께서 여로보암에게 하신 신탁을 이루시기 위해 이렇게 일을 꾸미셨다고 적는다.
백성들은 왕이 자신들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다윗 왕조를 인정하지 않고 열두 지파 연합 왕국을 해체했다. (이렇게 르호보암은 유다 지방의 성읍들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만 다스리게 되었다.) 르호보암은 부역감독 아도람을 내보냈지만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돌로 쳐죽이자, 마차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쳤다.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돌아 온 여러보암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했다. 오직 유다 지파만 다윗 왕조를 따랐다. 르호보암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총 동원하여 정병 십팔 만명을 뽑아 이스라엘을 무찌르고 열두지파 연합 왕국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야훼께서 하느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백성들에게 분열 왕국은 주님의 뜻이니 동족인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가지 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야훼의 말씀을 따라 모두들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열왕기상 12:12-24
//’모사재인’이나 ‘성사재천’이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뜻대로 연합왕국을 이끌려고 했지만 하늘의 뜻은 분열왕국이었다. (르호보암은 정말로 여로보암에 대한 신탁을 몰랐을까?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음~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리라.) 르호보암은 친구들의 조언대로 부역감독 아도람에게 쇠채찍을 들려 내보냈지만, 백성들은 아도람을 돌로 쳐죽였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목이 곧았다.)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에게 총 동원령을 내려 무력으로라도 통일 왕국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통해 분열 왕국이라는 하늘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셨다. 그나마 유다와 베냐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들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총동원된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충동적이고 선동적이어서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르호보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

https://quietwaters.blog/2023/10/04/

열왕기상 12:1-11

열왕기상 12:1-11

솔로몬이 죽자 온 이스라엘이 세겜에 모여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모였다. 이집트로 피해 머물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죽자 돌아와 온 이스라엘의 대표로 르호보암에게 말했다. 르호보암이 솔로몬이 백성에게 메웠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왕으로 받들어 섬기겠다고 말했다. 르호보암은 삼일간 말미를 얻었다. 르호보암은 먼저 솔로몬을 섬겼던 나이 많은 신하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백성이 영원히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 신하들의 조언을 따랐다. 그들은 솔로몬의 멍에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백성에게 지우라고 말했다. 솔로몬의 가죽채찍 대신에 쇠채찍으로 다스리겠다고 대답하라고 말했다.

열왕기상 12:1-11
//열왕기 책의 시작은 다윗과 솔로몬의 왕위계승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핵심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하고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긴 것이다. 옛날 족장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장자를 축복하는 전통을 이어가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하는 이야기에는 더 이상 언약적 축복/유언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세상 왕조의 왕위계승과 다를바 없다. //이스라엘은 열두지파의 연합왕국이었다. 왕위 계승에 하나님의 주권적 기름부음이 없다면, 열두지파의 합의가 필요했다. 세겜은 이런 열두지파의 합의를 도출하는 자리였다. 르호보암은 아히야를 통해 주신 신탁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솔로몬으로부터 아무런 유언/북복도 받지 못하고,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한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대신 듣기 좋은 친구들의 생각을 따른다. //대통령 선거가 목전이다. 윤석열 정부는 온갖 잡신을 따라 기득권을 지키려다 나라 살림을 말아먹더니, 마침내 가죽채찍 대신 쇠채찍을 들다가 스스로 망했다. 지도자는 누구의 소리를 들어야 하나? 내 귀에 달콤하면 독이다. 기득권 유지에 거스리는 참모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랜만에 잠언을 소환한다. ‘착한 사람이 세력을 펴면 백성이 기뻐하지만 나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백성이 한숨짓는다. 착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돌보지만 나쁜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잠29:2,7 공동번역)’ 지난 선거에서 미미한 차이지만 이씨는 소위 나쁜 사람으로 버림을 받았고 윤씨는 소위 착한 사람 코스프레로 선택을 받았다. 그런데 잠언은 착하고 나쁨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돌보느냐 아니냐로 구별한다. 우리의 잣대를 버리고 이 기준에 따르면 이번에는 누가 더 착할까? 이번 선거에서는 제발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더 돌보는 사람이 선택되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