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3:18-29

모세의 축복이 이어진다.  (어제와 같이 간단히 적용한다면)

스블론처럼 해외투자의 번성을 (해외 선교를) 기뻐해야하며, 잇사갈처럼 내수경기를 (국내 전도를) 활성화 시켜  즐거워해야 한다. 갓처럼 새로운 투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을 찬송하며,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어야 하나 주님의 공의와 율법에 따라야 한다. 단처럼 작은성과에도 만족해야 한다. 납달리처럼 주어진 은혜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아셀처럼 받은 복을 세어보며 평화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축복했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하나님(신)과 같은 신(하나님)은 달리 없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피난처가 되시고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신다. 원수는 쫓아내시고 진멸하게 하신다. 곡식과 포도주가 가득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이런 복을 받았다. 약속인데 이미 받았다라고 기록한다.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 주 하나님이 너희의 방패시요 너희를 돕는 분이시다. 공격할 때는 너희의 칼이 되신다. 원수들이 너희들에게 굴복할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신명기 33:1-17

하나님의 사람 모세. 마치 야곱이 12지파를 축복하듯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아비가 된 것이다. 모세가 영적으로 낳았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지파별로 축복할 수 있는 근거는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성도로 부르셔서, 주님의 말씀을 받는 백성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파별로 본격적인 축복에 앞서 4절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라고 서문을 연다. 율법이 야곱, 즉 이스라엘의 기업이다. 소유라고 한다.

32장 9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기록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주 하나님을 드러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율법이 곧 주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진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모세의 축복은 왕되신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축복이다. 당시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는 지파별 축복이 중요할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공동체로서의 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파의 지도자를 한자리에 모였을 때 모세는 축복을 한다.

르우벤처럼 살아남아야 하고, 유다처럼 대적을 무찔러야 하고, 레위처럼 주의 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며 대적을 꺾어야 하며, 베냐민처럼 보호받아야 하고, 요셉처럼 은혜를 받아 복을 누려야 한다.

성도에 따라 받은 은사와 역할이 다 다르지만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에 참여해야 한다. 비교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하나되려고 힘써야 한다. (불행히도 육적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신명기 32:34-52

모세의 노래 마지막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당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아마도 노래 전체의 결론일 것이다. 주님이 당신의 종들은 불쌍히 여기시고 불순종으로  주님의 백성에서 ‘그들’이 되어 그들의 신을 찾고, 그들의 신을 반석으로 삼는 원수들은 보복하신다. 이렇게 주님나라를 깨끗하게 하신다.

결국 모세의 노래는  ‘broken hallelujah’ 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함께 백성에게 이 노래를 모두 다 들려주였다. 우리 인생은  broken 을 뺀  할렐루야로만 장식되어질 수 없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을 할렐루야로 결말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노래를 마친 후 이 노래를 마음에 간직해 두고, 자녀들에게 가르쳐,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게 하라고 당부한다. 이 율법이 생명이라고 강조한다. 이 율법을 순종해야 할렐루야를  오래오래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땅이 아니라 마음이다. 노래를 가르친 후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아라. 그러나 약속의 땅에는 못들어 간다. 눈으로만 바라보기만 해라. 땅에 집착하면 모세는 실패자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주님을 대면하며 살았다. 마음에 할례를 받고 살았다. 약속의 땅을 온전히 맛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broken hallelujah 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그 삶은 성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성공했다. 육적 약속의 땅 가나안에는 못들어 가지만 (살아 있는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주님과의 교제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막 12:26,27)

사족: 요즘 즐겨부르는  Leonard Cohen  이 작사한 hallelujah 가 차디차고 상처뿐인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할렐루야가 있을까하여 가사 없이 멜로디만 읍조렸다. 그러다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우리말로 된 시도 읽기 어려운데 영어 가사라 직역도 안되고 행간을 읽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간음과 살인을 한 다윗왕도, 여색에 빠져 머리카락이 잘렸던 삼손도 결국은 할렐루야를 부를 수 밖에 없다고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과거의 아픈 추억이나 잘나가던 순간들, 실연의 아픔 등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할렐루야를 불러야 한다.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져도, 신자들 마져도 이웃 사랑보다는 이웃을 정죄하는 것만 배운 것 같아도,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밤이라 해도, 차디 찬 곳에 버려졌어도, 그래서 상처뿐인 삶을 살아도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참 신앙이 아닌가? 난 코헨이 어떤 의미로 시를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온전해서 할렐루야를 부르는 게 아니다. 주님이 온전하셔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산다.

 

신명기 32:15-33

(노래가 이어진다.)

발로 차고, 버리고, 업신여기고. 기름지고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지자 이스라엘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취한 행동이다.

다른 신을 섬겨 주 하나님을 격노케 한다. 주 하나님 대신 목석의 우상, 알지 못하던 귀신들에게 제사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따른다. 창조주를 잊어버렸다.

주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은 미워하신다. 부모를 격노케하는 자녀라고 하신다. 패역하고 진실없는 자녀로 인해 (창피하여)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니실 수 없다.

백성들이 주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주님을 질투하고 격노케 했듯이 주님은 백성 아닌자로, 어리석은 민족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일으키실 것이다.

반석을 주 하나님이 아닌, 주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 다른 곳에서 찾은 결과다. 백성에서 그냥 ‘그들’ 이 된다. 지혜없고 분별력 없는 민족이 된다. 다른 반석들도 주님보다 못한 것을 스스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저들이(다른 반석, 원수들) 자고할까하여 주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완전히 끊어지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종말을 향한 저주가 이어지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 한명에게 천명이 쫓기고 두명에게 만명이 쫓길 정도로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에서 ‘그들’로 쇠락할 것이다. 천명 만명이 떠든들 (행함과 진실함이 없으면 ) 한두명의 주장을 감당할 수 없는 사회가 된다.

불순종의 ‘그들’은 원수와 다를게 없다. 그들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며 (세상 가치관에 휘둘려) 망할 날을 향해 달린다.

신명기 31:30-32:14

모세는 이 노래의 가사를 (말씀을) 끝까지 읽어서 백성들에게 들려준다. (마치 잠자리에 드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분위기가 연상될까? 이렇듯 읽는 사람은 끝까지 읽어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다가 잠이드는 아이가 되었던 것일까?)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과 땅에, 온 세상은 노래를 들어라.

온 세상에 주님의 교훈이 비처럼 내렸다.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고 주님을 경외하라.

주님은 반석이시고 완전하시고 정의롭고 진실하시며 거짓이 없으시며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악을 행한다.주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삐뚤어지게 행한다.

어리석고 지혜없는 백성이 되어 주님께 배은망덕했다. 주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창조주다.

옛날을 기억하라. 부모세대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은 네게 대답할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이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삼으셨다.

주님이 남겨 주실 것은 주님의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바로 주님의 백성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광야에서 만나주셨고 지켜주셨고 보호하셨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는 것같이

주 하나님만이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이 없었다.

주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먹여주셨다.

6절 상반절 “어리석고 지혜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가 모세가 들려준 노래 첫부분의 핵심이 아닐까? 예수님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은 자들을 어리석다 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로 하셨다. 듣는 귀만 가졌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말과 혀로는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지만 행함과 진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듣기만 하는, 말과 혀로만 노래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노래한다.

모세가 읽어주는 노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다.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노래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우리도 삶으로 살아내야 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다. 개인적이지 않고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서로 화답하며 불러내야, 살아내야 할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