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9-19

예수님도 보고 나사로도 보고. 나사로, 나사로, 나사로, 나사로! 분명 종려주일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나사로의 이름도 네번 언급된다. 나사로는 ‘하나님은 도움이시다’ 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구원과 도움’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했다. 호산나 ~ 호산나 ~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만 생각했다. 온 세상이 호산나를 불러 재낀 이유다. 심지어 바리새파 사람들도 온 세상이 예수님 편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다. 말씀의 성취다. 부활의 기적을 생각하며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 앞에 기우뚱 거리며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이 등장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죽이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어갔다고 서로 수근 거렸는데 반전의 여지가 생겼다.

예레미야애가 5:11-22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애가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화관 대신 재를

희락 대신 슬픔

찬송 대신 근심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않고 욕을 당했다. 대신 대적들만 호가호위 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주께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면 우리 스스로는 돌이킬 능력이 없다. 그러니

시인은 절망한다. 우리를 아주 버리셨죠. 우리를 크나 큰 진노 아래 두셨죠.

그러나 시인은 ‘아주 버리신 것은 아니죠. 돌이킬 수 없는 진노는 아니죠’라고 읊조린다. 오 주님! 시인은 무궁한 주의 인자와 긍휼을 고대한다.”

  1. 야훼여, 주께 돌아가도록 우리를 돌이켜 세워주십시오. 우리를 예전처럼 잘살게 해주십시오.
  2. 주께서는 아무리 화가 나시어도 우리를 아주 잘라버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동번역) 

시인은 19절에 의지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예레미야애가 5:1-10

시인은 자신들이 받은 치욕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나라를 빼앗겼다. 땅도 집도 빼앗겼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 근본을 빼앗긴 것이다.)

나라만 잃은 것이 아니다. 부모도 잃었고 남편도 잃었다.

당연히 경제권도 빼앗겼다.

핍박을 당하고 쉴 새없이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

침략자 약달자 편에 서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하였다.

(조상들의 불순종으로 조상뿐 아니라 후대들도 벌을 받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도 아니고 앗수르의 왕도 아니고 그들이 파견한 종들 밑에서 종살이 해야 했다.

도망친들 칼에 죽거나 살아도 겨우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다.

굶기를 밥먹듯 하니 (쓰레기 더미를 뒤지느라) 몸을 씻을 수도 없다.

 

// 치욕중의 치욕은 나라를 잃은 것이다. 시인은 조상들의 불순종의 결과라고 언급한다. 검뎅이가 묻어도 씻을 수 없는 치욕! 10절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라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세상 것에 탐욕하니 우리가 죄악중에 있나이다.’로 들린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레미야애가 4:11-22

주님은 기초까지 불태우셨다. (우리의 믿음을 근본부터 살펴야 한다.)

대적과 원수들을 이용하신다. (설마가 사람잡는다.)

종교지도자의 죄악때문이다. (의인도 피를 흘린다.)

앞을 못보는 더러운 지도자들 (아무도 가까이 하거나 따르지 않는다.)

부정하다고 비키라고 하니 그들은 떠돌이가 된다. (이방인들도 맞아주지 않는다.)

주님께서 지도자들을 흩으시니 (이방인들도 지도자들을 높이거나 대접할리 없다.)

동맹국을 향해 도움을 바랐으나 (희망고문이었다.)

침략자들이 우리를 감시한다. (한마디로 끝났다.)

곳곳에  CCTV를 설치해서 감시한다. (우리가 숨을 곳은 없다.)

우리의 콧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 함정에 빠졌다. (왕이든 종교지도자든 마찬가지다.)

세상아 즐거워 하라. (그러나 심판의 잔을 마시면 네 죄악도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교회야 벌을 받아라. (그러나 벌을 다 받으면 주께서 다시는 벌 받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죄악의 형벌은 기초까지 싹 불살라야 끝난다. 대충 씻어서는 깨끗해 지지 않는다. 용광로에 들어가 불순물을 다 태워야 정금이 된다. 불순물을 넣은 것이 종교지도자요, 사회 지도자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부정하다. 저리가라 저리가라 저리가라. 저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온통 다 부정하다. 심지어 검뎅이가 ‘누가 내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는 세상이다.

또 정결함을 구한다. 정결한 맘 주시 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예레미야애가 4:1-10

// 솔직히 슬프다 슬프다 또 슬프다하니 성경읽는 나도 힘들다. 그런데 이 모든 슬픔은 자초한 것이다.

금이 빛을 잃었으니 순금이 변질 되었으니 성전이 무너저 내렸다.

(소금이 맛을 잃고 소금이 변질 되면 마찬가지로 밟힐뿐이다.)

순금같던 이스라엘이 던저버리면 깨어질 질항아리가 되었다.

갓태어난 자녀들도 돌볼 능력도 없다.

혹시나 쓰레기 더미를 뒤져보지만 무엇하나 건질 수 없다.

소돔의 무너짐보다 더 큰 죄가 넘치는 성이 되어버렸다.

화려한 보석같던 모습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되었다.

차라리 칼에 죽었더라면 대가 끊어지고 자녀를 삶아 먹는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시인은 패망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탄하고 있다. 자녀를 삶아 먹는 극심한 굶주림을 언급한다. (쓰레기 매립장 같은 곳에서 사는) 자신들의 처지를 소돔의 멸망에 빗댄다. 금이 빛을 잃을 수 있듯이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있다. 성전의 돌들이 무너지듯 맛을 잃은 소금도 밟힌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말씀의 기근으로 우리의 영적 모습도 피골이 상접해 보이지는 않을까? 자녀세대에도 신령한 젖대신 곰팡이가 쓴 빵만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금그릇이든 질항아리든 더러우면 쓸 수 없다.) 비참하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예배당의 벽(돌)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