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1-11] 베다니 삼남매

베다니 삼남매가 다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마르다는 여전히 분주하다. 그녀는 오늘 본문에서는 “일을 하고(to serve)”라고 짧게 언급된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께서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셨다. 무대 뒤편에서 이렇게 시중드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시중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 다섯번이나 언급된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이 아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이다. 그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으면 되는 단역이다. 그에게는 대사가 필요없다.

마리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누구나 마리아의 배역을 하고 싶지 않을까? 대사는 없더라도 오늘 무대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등장하는 배우다.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씼었다. 시중(섬김)의 대상도 예수님이요 삶의 주인도 예수님이다. 마르다와 나사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을 다 찾을 수 있다.

마리아. 두 렙돈이 자기의 생활비 전부였던 (의미상으로는 ‘자신의 모든 소유 전부’)  과부이야기 처럼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소유의 전부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금액으로 따지면 노동자의1년 연봉에 해당하지만) 즉 마리아는 자기 소유 전부를 모두 팔아 진주를, 보화가 묻힌 밭을 산 것이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구경꾼도 있다. (결혼식장에 왔는데 신랑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는 구경꾼으로 등장한다. 사실 큰 무리가 구경꾼들로 등장한다. 이들중 많은 이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 구경꾼으로 왔다가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불행하게도 유다는 구경꾼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구경꾼은 잔치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얼마짜리 예식이었는지 주판을 튕긴다. 허례허식인지 검소한 알뜰 예식이었는지 따질 것이다. 신부드레스는 얼마인지가 더 궁금할 것이다. 예식의 주인공은 더 이상 저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주인공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저 잔치 음식이나 입에 넣고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다.

[요 11:47-57] 예파라치

“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2]

많은 표적을 행하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예수님의 등장에 기득권자들이 모여 대책을 세운다. 대세가 예수님께 기울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는 로마통치하에서 굳건하게 유지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서였다.

이때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예수가 죽으면 기득권을 유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고 과대 포장을 하지만 자신들의 유익을 좇은 결론이었다. 소위 대제사장인 가야바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그 민족 (이스라엘)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라고 기록한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에는 이방인들을 포함한다고 봐야한다.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좁게 이해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요10:1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 성부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이유다. [요 10:17]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의를 성부하나님께서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아직 선한목자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신다.

유월절때가 되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찾았다. (파파라치들이 이시대부터 있었구나.) 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은 어느새 현상범이 되어버렸다. 물질적 복과 평안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도 저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

 

시작하면서

그동안 말씀묵상 내용을 위키스페이스와 페이스북을 통해 적어왔다. 그런데 위키스페이스는 유료화 되었고 페이스북에는 말씀묵상보다는 그냥 일상을 담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묵상 공간을 찾다가 워드프레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필명은 thru14mm 로 하기로 했다. 내 카메라에는 14미리 단렌즈가 달려있다. 미러리스라 28미리지만. 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약간 광각이라 피사체가 작게 보인다. 그래서 디테일을 담으려면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약간의 왜곡은 감수하면서도.

나의 성경읽기도 이와 비슷하다. 말씀을 묵상하려면 더 깊이 다가가야 하고 그 결과는 왜곡?에 가깝다. 주관적이라는 의미다. 어디까지나 나의 묵상이다.

garhamkwon은 시간나는대로 내글을 번역해서 올리기로 했다. 아들과 말씀묵상을 나눌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