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 삼남매가 다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마르다는 여전히 분주하다. 그녀는 오늘 본문에서는 “일을 하고(to serve)”라고 짧게 언급된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마르다를 예수님께서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셨다. 무대 뒤편에서 이렇게 시중드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시중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 다섯번이나 언급된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이 아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이다. 그의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으면 되는 단역이다. 그에게는 대사가 필요없다.
마리아.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누구나 마리아의 배역을 하고 싶지 않을까? 대사는 없더라도 오늘 무대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등장하는 배우다.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씼었다. 시중(섬김)의 대상도 예수님이요 삶의 주인도 예수님이다. 마르다와 나사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을 다 찾을 수 있다.
마리아. 두 렙돈이 자기의 생활비 전부였던 (의미상으로는 ‘자신의 모든 소유 전부’) 과부이야기 처럼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소유의 전부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금액으로 따지면 노동자의1년 연봉에 해당하지만) 즉 마리아는 자기 소유 전부를 모두 팔아 진주를, 보화가 묻힌 밭을 산 것이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구경꾼도 있다. (결혼식장에 왔는데 신랑신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유다는 구경꾼으로 등장한다. 사실 큰 무리가 구경꾼들로 등장한다. 이들중 많은 이들이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 구경꾼으로 왔다가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불행하게도 유다는 구경꾼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구경꾼은 잔치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얼마짜리 예식이었는지 주판을 튕긴다. 허례허식인지 검소한 알뜰 예식이었는지 따질 것이다. 신부드레스는 얼마인지가 더 궁금할 것이다. 예식의 주인공은 더 이상 저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주인공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저 잔치 음식이나 입에 넣고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