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11:26-35] 바람

[민 11:26-35] 바람

칠십인의 노인들 중 엘닷과 메닷이 있었다. (히브리어로 이들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 과 ‘깊은 애정’이라고 한다.) 이 둘은 하나님의 영이 칠십인에게 임하였을 때 장막에 있지 않았고 진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둘에게도 영이 임하였고 진중에서 예언했다.

이 사실이 모세에게 전해졌다.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즉각 모세에게 엘닷과 메닷을 말리라고 보고하지만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백성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기원한다.

// 모세는 문제의 본질을 알았고 여호수아는 아직 멀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진다면 이 문제는 단숨에 해결될 것이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 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큐빗쯤에 내리게 한지라…”[3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의 손이 크심을, 아니 전능하심을 보이셨다. 그당시 하룻길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한 사람이 모은 열호멜의 고기 양을 부피로 따지면 약 2 큐빅정도라 하니 (대충 2톤) 그 양이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다.

// 31절의 ‘바람’은 모세와 칠십인 장로에게 임한 ‘영’과 같은 단어다. 하나님은 ‘영’으로 일하신다. 우리에게 ‘영’으로 힘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내 힘으로 순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의 샘이 되어야 할 그곳이 욕망의 무덤이 (기브롯 핫다아와)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람’이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거리와 두 큐빗쯤 높이로 충만했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고기’만 보았다. 오직 ‘고기바람’만 났으니, 고기에 온통 정신이 팔렸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보일리 만무다.

당신은 무슨 바람이 났는가? 혹 춤바람 아니면 술바람

이왕이면 ‘성령의 바람’이 나면 어떨까?!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7,18]

[민 11:16-25] ‘영’으로

[민 11:16-25] ‘영’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이 질릴 때까지 한달동안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토를 단다. “장정만 육십만명이나 되는 백성을 한달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요. 어림없습니다. 양과 소 떼를 잡아도, 아니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모아도 족하지 않습니다.”[21, 22]

//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애굽의 모든 지식을 다 잊어 버렸나보다. 자신들이 소유한 양과 소를 다 잡으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아도 족하지 않다는 과장된 표현을 하다니. 쯪쯪.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라고 대꾸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손이 크신” 분이시다. 씀씀이가 후하실 뿐아니라 수단이 좋고 많다. 아니 수단이 좋고 많으신 분을 너머 “전능”하시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에서의 열재양을 목격한, 아니 단순히 목격한 것이 아니라 대리자로 참여한 모세가 이것을 모를리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보다 자신의 계산이 앞섰다. 우리가 늘 범하는 잘못이다.

오늘 본문은 백성들을 불평과 원망으로 힘들어서 차라리 죽기를 구하는 [15] 모세에게 조력자 70명을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한다.  노인들 중 장로와 지도자가 될만한 칠십명을 모으라고 하셨다. 사실 ‘노인’과  ‘장로’는 같은 단어다. 그러니 노인 중의 노인을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보다 젊고 힘있는  참모들을 조력자로 생각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들 칠십인인 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으로? ‘영’으로! 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칠십 노인들에게도 모세에게와 같이 ‘영’을 임하게 하셔서 예언하게 하셨다. ( 오래는 하게 하지 않으셨다고 끝맺는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죽음으로 면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평과 원망을 함께 들어 줄 칠십명의 노인들을 세우셨다. 모세는 어쩌면 함께 ‘권위’로 불평과 원망을 억누를 참모들을 원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불평과 원망을 감내할 참모들을 주셨다.

사람의 손이 크면 얼마나 클까? 아무리 후하고 수단이 좋고 많아도 하나님 앞에 서면 손이 짧은 정도가 아니라 ‘마른 손’과 다름 없다. 마른 손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아/닙/니/다.”

[민 10:1-10] 은나팔 둘

[민 10:1-10] 은나팔 둘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각적 신호만으로 온백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다. 급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다. 광야에서의 이동은 행진이었다. 시각적 신호외에 청각적 신호도 필요했다. (어렸을 때 조회를 마치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행진곡에 맞춰 교실로 입실했었다. 아직도 쌍독수리행진곡은 입에 맴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행진곡이 있었을까? 적어도 첫마디는 있었던 모양이다. 은나팔 둘을 만들어 불어서 행진의 신호를 삼았으니. 스피커도 없던 시절 온 회중이 성막 앞에 나왔을 때 모세가 한 말을 제일 끝에서는 어찌 들었을까? 하물며 회막 앞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각 지파의 진에 머물러 있을때야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기는 불가능 했으리라. 그래서 은나팔 두개로 요즘으로 하면 싸이렌을 울렸다.

은나팔 두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9절 10절에 반전이 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지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고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은나팔 두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하고 찬양하는) 수단이었다.

내가 (우리가) 따라야 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내가 (우리가) 의지하고 찬양해야 할 분도 하나님이시다.

[민 9:15-23] 머물고 행진하기

[민 9:15-23] 머물고 행진하기

일생이 편하려면 남자들은 엄마와 아내와 네비게이션한테 꼭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 엥~~~ 영생이 편하려면  (영생을 누리려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가시적이기도 했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모양으로. 초막들이 즐비한 진영 한 가운데 웅장한? 회막이 있고 그 위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있었다. 동남서북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막을 롯데월드는 없었다.

매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면 진영 중앙에 있는 회막쪽을 바라 보았을 것이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준비를 해야했으니깐. 하루 일과의 시작은 회막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장의 명령을 기다리는 군사와 같이. 주목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이 있어도 아침마다 그들의 눈은 대장을 향했을 것이다. 직속상관이 아니라 제일 윗선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명령을 따라 진을 치고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명령을 따라…

하나님은 명령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종으로 (지켰더라로) 화답한다.

알지 못하는 땅, 그러나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에는 구름기둥 불기둥 네비게이션이 필요했다. 단순히 지도안내가 아니라 교통흐름까지 알려준다. 한번도 가 본 길이 아니라서 절대순종이 요구되는 길이다.

(그러나) 머물고 떠나는 것은 가시적 명령에 따랐지만 광야 생활은 주어진 율법을 준행하는 삶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는 삶이라기 보다 약속의 땅에서 사는 삶이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법에 순종하는 삶이다.

개인적 성별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구름과 불기둥이 있어서 모두가 바라보고 움직였으면 좋겠다.

[민 9:1-14] 발렌타인데이

[민 9:1-14] 발렌타인데이

유대인의 달력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성경에서도 모세오경과 포로기이후 달 이름들이 다양하다. 종교력과 민간력의 첫달도 다르다.  종교적으로 출애굽하면서 오늘날의 3,4월에 걸쳐있는 니산월이 첫달이 되었다. 그리고 이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다.

그런데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들은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다. 첫 유월절(출 12)에는 없었던 규정이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고 난 후에는 시체를 만지고 부정하게 된 자들은 정결의식을 통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어져야 했다. 그러니 정결케 되기까지 유월절 헌물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할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나님께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지정하셨다. 둘째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다. (유대력 2월 14일, 외우기 쉽게 발렌타인데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절기다.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가 동일하다고 한다. 소수를 위한 보충 유월절이지만 본 유월절의 규례를 간소화하지 않았다. 모든 율례대로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땜빵이 아니었다.

// 첫 유월절에도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출 12:49]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첫 유월절 규례에서는 이방인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출 12:43,44,45) 참석을 원하는 이방인은 할례를 받고 본토인과 같이 된 후에야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선행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광야에서도 이 조건이 적용되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유월절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한달  후 보충 유월절을 지정하셨다. 유월절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보충 유월절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을까? 구약의 유월절 규례는 삼진아웃이 아니라 이진아웃이다. 한번의 기회는 더 있을지 몰라도 삼세번은 아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발렌타인데이도 필요없다. 대신 매일 매일 우리들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아야 한다. (고전 5:7)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정결해야 한다. 음행을 멀리해야 한다.

내가 깨끗해서 거룩하다 인정받는 게 아니라 거룩하다 하시니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