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8:1-26] 보청기와 은퇴

[민 8:1-26] 보청기와 은퇴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에 대한 정결의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정결의식의 핵심은 레위인이라 하더라도 죄에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외적으로도 옷을 빨고) 또 아론 (제사장)을 통해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옷을 단정히 입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앞에 나갈 수 없다.

레위인정결의식이 레위인 회막에서 일할  인구조사( 4장) 보다 먼저인지 나중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 다른 것은 회막에서 일할 나이를 다섯살 어리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서른에서 스물다섯으로. 솔로몬때로 가면 스무살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나이가 더  낮아진다. (민수기 4장과 이곳 8장사이에는 역사적 간격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때는 봉사의 나이가 아니라 봉사 인원이 중요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좀 더 어린 나이의 레위인도 회막일 (혹은 관련된 일)에 참여 시켰을 것이다.

“오십 세부터는 그 일을 쉬어 봉사하지 아니할 것이나 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것이요 일하지 아니 할 것이라.”[25, 26]

그런데 은퇴 나이는 구약에서 일관되게 쉰살로 규정하고 있다. 오십세. 주로 육체적 노동으로 회막일을 지원하던 레위인들에게 있어서 적당한 나이일지 모른다. 이때쯤되면 제사장의 지시를 들을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자신만의 노하후로도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힘에 겨울뿐. 그러나 회막일은 끝까지 제사장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일이다.

지금으로 하면 몇살 일까? 일흔? 하여간 은퇴후에는 돕되 일하지 말라고 한다. 도와라 그러나 일하지는 말아라.   선임자나 연장자는 자신의 경험과 경륜으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후임자나  젊은이들을 막아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늙은 양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 들을까?

눈과 달리 사람의 귀가 어두워 지는 것을 본인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주위는 안다고 한다. 영적인 귀가 어두워 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청기가 필요하다면 은퇴해야 한다. (좋은 보청기가 많다고 하지 말자 24시간 끼고 살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영적인 보청기는 신실한 믿음의 후배요 자녀다.

 

[민 7:12-89] 그분 목소리

[민 7:12-89] 그분 목소리

// 회막을 봉헌하면서 열두지파 지도자들이 제단헌물을 하루에 한 지파씩 드렸다. 드린 헌물은 열두날 동안 똑 같았다. 그런데 모세는 각 지파가 드린 예물을 일일이 반복하여 기록했다. 현대인의 성경은 반복해서 기록하지 않고 (몇절과 같음) 이라고 기록한다. 헌물을 드린 순서는 진영배치의 동남서북 순서와 같다. 열두날 동안 반복된 헌물에 차이가 없음은 84-88절에서 합산해서 정리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껫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89]

말하러 들어간 사람은 모세다. 그런데 실제로 말을 하신분은 하나님이시다. 모세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가 화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청자인지 명확히 밝혀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도하러 (하나님께 뭔가 말하려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말만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ㅠㅠ. 때론 나의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러니 결혼하라. 아내에게는 남편이 남편에게는 아내가 그런 좋은 친구다. 물론 하나님께도 넋두리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다. 때론 오늘 본문처럼 길고 질리도록 반복되지만 들어야 한다.

나는 선한목자의 목소리를 아는가?

// 목소리를 모른다면 수화기를 냉큼 내려놓게 된다.

[민 7:1-11] 기름을 발라

[민 7:1-11] 기름을 발라

장막이 세워지자 모세는 장막과 장막안의 모든 기구와 제단과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때 하는 의식이다. 기름을 부음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물건의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드러낸다.

기름부음을 받은 장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곳이 되었다. 이곳에 열두지파의 대표들이 헌물을 드렸다. 여섯대의 수레와 열두마리의 소.

하나님께서는 이 헌물을 레위인들에게 주어 회막에서 봉사할 때 사용하라고 하셨다. 가장 무거운 것을 나르는 므라리 자손에게 수레 넷과 여덟마리의 소를 그리고 게르손 자손에게 나머지 두대의 수레와  네마리의 소를 주었다. 성소의 기물을 어깨로 메어 나르는 고핫 자손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은 철저하게 직무에 따라 레위인에게 주어졌다. 장유유서의 서열도 아니고 하는 직무의 중요성?에 따르지도 않았다. 직함이 아닌 직무의 필요성에 따라 주어졌다.

우리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요일 2:27]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기름부음으로 거룩해 졌다. 우리의 권위가 기름을 부으신 주께 있다. 나의 거룩함은 기름부음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안에 거하므로 유지된다. 외적으로는 내가 (우리가) 의를 행하므로 내가 (우리가) 주안에 거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된다.

나에게 무슨 은사가 주어졌는가? 나에게 주어진 은사도 장유유서의 질서나 나의 직함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주어졌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때론 차별적으로. 나에게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나안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거하는 것이다.

 

 

[민6:13-27] 내면적 나실인

[민6:13-27] 내면적 나실인

헌신의 마침은 축복이다. 개인적 축복이 아니라 공동체적 축복이다.

나실인은 서원으로 시작하고 제사로 마친다. 종결에 관한 법이 더 세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후에는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느니라”[20] 한시적 나실인은 서원 기한이 차면 나실인 종결 각종 제사를 드려야 했다. 마지막이 화목제사다. 그 는 머리를 깎고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헌신은 헌물과 종결의식을 행함으로 마무리 된다. 법에 명시한 것은 기본이고 힘이 미치는 대로 하라고 한다.[21] 머리도 깎았고 포도주도 마셔도 되지만, 즉 더이상 외형적 나실인은 아니지만 내면적 나실인이 된 것이다.

// 하나님은 나에게도 거룩하라 하신다.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신다.

그래서인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신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

[민 6:1-12] 헌신

[민 6:1-12] 헌신

헌신은 “부정에서 떠나” 구별되는 것이다. 성경은 부정에서 떠나 구별된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셔서 나사렛사람이라고 불리운 것도 어쩌면 이 단어와 관계있을 것이다.

나실인이 특별히 하지 말아야 할 것 세가지가 있다. 술과 이발과 시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술은 성령이 계실 곳을 차지한다. 헌신하는 동안은 포도주뿐 아니라 포도즙도 생포도도 건포도도 먹지말라고 한다.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도 먹지말라고 명하신다. (성찬식때 포도주 대신 포도주스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은…) 하여간 술취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내적으로 채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3] 머리는 권세를 뜻한다. 히브리어 구별하다는 단어의 명사형인 네제르에는 화관(왕관)이라는 뜻도 있다. (‘서원’, ‘구별’, ‘구별하다’ 히브리어로 다 비슷비슷한 단어인 듯.) 그러니 머리를 깎지 말라는 명령은 헌신한 자의 머리, 즉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외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의 머리에 있음이라.”[7]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 9:60] 세번째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시체는 ‘죽은 생명체’이다. 생명은 죽음과 함께 할 수 없다. 헌신은 내적으로는 성령충만이요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드러내는 삶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삶이다.

헌신의 삶은 부지간에 무효가 될 수 있다. 내가 검댕이를 멀리해도 검댕이가 내게 달려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헌신의 삶이 무효가 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헌신을 새로 정하면 된다.[12] 일곱째 되는 날, 주일마다 정결케 하자. 작심삼일이 아니라 매일결심을 하면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땅에서도 매일 부활의 삶을 살았던 바울 사도의 고백이다.

이땅에서 죽지 않으면 부활을 어찌 경험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