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99

시 99

“거룩하신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시편기자는 주님의 다스리심이 공의와 정의라고 노래하면서 “주님은 거룩하시다!”라고 세번 강조합니다. 하나님나라가 공의와 정의로 다스려지는 이유는 주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구별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귀가 따갑게 들어왔는데, 결국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의 예로 설명합니다.

주님이 세상 신과 다른 것은 ‘듣고 응답’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신은 우상이라 지각이 없습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모세, 아론, 사무엘이 부르짖을 때마다 듣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아니 듣고 응답하시는 차원을 너머 주도권을 쥐시고 말씀해 주시고 계명과 율례를 주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은 그 주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결국 거룩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부르짖고 응답받고, 말씀하시고 순종하고. 이 교제가 가능한 이유가 주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은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판결은 ‘용서’였습니다. 거룩함의 최고봉은 용서라고 생각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제가 선 이땅에서도 그분을 경배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시 98

시 98

새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1)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

// 시험볼 때 지문을 읽는 요령중 하나는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주의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간은 온통 서론(첫문장)을 뒷바침하거나 결론(마지막 문장)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시와 노래에는 적용하기 뭐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붙여보았다. 2절에서 8절은 구원을 알게 하신 주님을 모두가 모든 방법으로 찬양하라, 노래하라라는 명령으로 채웠다.

붙여놓고 보니 아침마다 새롭게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 진다. 먼저 주의 능력으로 (오른 손과 거룩한 팔로)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세계를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신다. 주님은 구원자로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 임재하신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노래해야 하지만 의와 공평으로도 노래해야 할 이유다. 구원을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의와 공평도 노래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 구절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시 97

시편 97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1, 12)

주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노래의 첫구절은 세상이 즐거워 하고 기뻐하며, 의인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다. 지난 열흘간 에스더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보았다.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서가 아니라, 유다인을 대적의 손에서 구하시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사제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이름없는 유다인들에게 완전하지 않지만 믿음의 삶이 있음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치를 경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무조건 이겨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저 불신자 대신 총리가 되게 해 주셔야 하고,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을 따야하고, 세계적인 콩쿨에서 입상시켜 주셔야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착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나치게 말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이기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가치와는 다르다. 세상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스리신다.”

주님께서 공의와 정의의 보좌에 임재하셔서 (2)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신다.(11) 그러니 우리가 거둘 것도 빛이요 기쁨이다.

성령으로 사방의 모든 대적을 불살라 없애시는 주님처럼 (3)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악을 미워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10)

빛이 세상에 왔으나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두려워 떨었다.(4) 왜냐하면 주님은 온땅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9)

(세상적인) 도움을 구하기 위해 바라보는 산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은 평탕하게 될 것이니(5),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심판에 기뻐하며 즐거워 한다.(8)

하늘은 의를 선포하고 백성들은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나 (6)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자들은 우상숭배로 우상들과 같이 감각없는 자가 되어 수치를 당할 것이니, 자신이 신이된 것처럼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해야 한다.(7)

“주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나라는 승자독식의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는 나라다.  의인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다.

 

에스더 9:20-10:3

에스더 9:20-10:3

부림절. 이스라엘이 오늘날에도 지키는 가장 큰 명절중의 하나라고 한다. 부림절이라는 이름은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할 날 아달월 13일을 ‘부르’ (주사위의 일종)를 던져 정했는데, 유다인들이 대적을 물리치고 이 ‘부르’라는 주사위의 이름을 따서 부림절이라고 불렀다. (9:26)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찬양도 기도도 한줄 나오지 않는다는 에스더의 유다인들. 맘몬신을 모시고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사는 사회에서도 저들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다. 박수와 술객 무리는 하만 앞에서  365분의 1의 확률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으나,이 날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은유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승전일도 독립기념일도 아니고 악한 하만이 던진 ‘부르’ 주사위를 비웃는 절기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다.)

모드르개는 대적을 물리친 기쁨의 날, 잔치의 날인 14, 15일 부림절을 규례로 정해 지키라고 명했다.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9: 21,22)

부림절은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특별히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잔치는 (파티와 다르게) 가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온 공동체가 즐겨야 한다. //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는 성경의 일관된 가름침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도 가난한 자를 구제함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는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하셨다. (눅 12:31-33) 술취함과 성적타락의 방탕함이 난무하는 맘몬신을 섬기는 이 악한 때에도 적용해야 하는 세월을 아끼는 방법중 하나일 것이다.

부림절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 없는 당시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사람들이 세상일을 주관하는 것 같으나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였고, 세상은 만몬신을 따르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였다.

모르드개에서 그치지 않고 에스더까지 한번 더 온 유다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부림절을 지키라.’ 두번째 편지에서는 잔치대신 금식을 명하였다. 부림절(대적을 물리침)이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심하고 수산성 온 유다인들에게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 달라고 모르드개에게 명하였고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라는 순종의 결과임을 상기 시킨다. 결코 대적을 물리친 승전의 기쁨에만 취하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라고 직접적으로 말못하지만 유다인에게 금식은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에스더서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이름조차 맘대로 부를 수 없었던, 소수민족으로 창씨개명하고 살아야했던 그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프놈펜도 술취함과 성적타락으로 방탕한, 맘몬신을 섬기는 땅이다. 불교국가니 그리스도인은 소수민족이다. ‘악한 꾀’가 언제든지 위협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모르드개나 에스더 같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많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술집만 늘어난다.

 

 

 

에스더 9:1-19

에스더 9:1-19

오늘 본문의 삼세번은 ”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이다. 대적의 재산을 취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아예 합법화하려고 조서에 명시까지 하였다. 율법적으로 적용한다면 대적의 재산을 탈취해야 한다. 취하지 않으면 불순종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적의 재산에 손대지 않았다. (싸움의 본질을 흐리지 않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지난 에베소서 묵상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먹고 마시고 술취하고 방탕한 제국의 한 가운데 사는 유다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니 놀랍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가치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도 본질보다 잿밥에 관심있다. 고난은 믿음이 작은 결과요 (재물과 건강과 자녀가 세상에서 잘되는) 축복은 믿음이 큰 자가 받는다고 가르친다. 대놓고는 가르치지 않겠지만 교회에서도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그런 분이 대접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삼세번’이 나에게는 에스더서의 하이라이트다. 제국에서 출세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총리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아닌, 이름 없이 살아가는 (남은 자) 유다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삼세번 반복되는 단 한 줄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매스컴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볼 수 없지만 (오히려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은 나온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친구들, 생명을 위하여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잠 1:19) 성도들이다. 때로 아픈 소식이 들려와도 난 감사한다. 선줄로 생각했는데 넘어졌다는 소식만 들리지 않길 바랄뿐이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사 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