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2:-22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자여 평안을) 생각하라! [엡2: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평강(화평)을 누리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 둘이 한 몸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과 평안(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 백성이 아니어서 세상에서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다(12). 유대인은 율법에 갇혀있었다 (15). 결국 할례와 무할례자 사이의 막힌 담은, 둘 모두 하나님과도 원수되게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먼데 있는 무할례자, 가까이 있는 할례자에게 평강(평안)을 (은혜로) 전해주셔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성령 안에서’ 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방법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 ‘성령 안에서’의 초석이다. 은혜로 구원받음은 하나님과 성도 (심지어 원수 사이였다 할지라도)간의 평안이다.

‘오직 은혜’ 는 평안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삶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순간까지만 (은혜만) 기억하고 감사해서는 안된다.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오직 평안!’

엡 2:1-

평창(올림픽)의 기적을 믿는다. (스포츠면 기사 제목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바람이다. 이미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근심 혹은 염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의심하니 불신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런 믿음, 기적을 바라는 심정이 아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진인사대천명’이 66아니다. 우리 행위로 하늘의 뜻을 바꾸는 것도, 숙명론적으로 하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차라리 ‘대천명진인사’ 가 믿음이다. 은혜로 하늘의 뜻을 (기다리다 이미) 받았으니, 그뜻을 따라 순종을 다하는 것이 믿음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엡2:1) 우리가 어찌 하늘의 뜻을 따라 진인사 할 수 있으리요. 세상풍조와 악인의 꾀를 따르는 불순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았으니 (대천명도 할 수 없다)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은혜로 구원 받았다. 이것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밝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살아나심, 부활은 우리의 부활도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우리의 부활도 확정적이다.

이 은혜를 믿음으로 우리도 부활의 삶을 산다. 우리 행위에는 자랑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 오히려 부활신앙으로 선한 일, 즉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다.

‘오직 은혜’

엡 1:15-23

[엡 1:15-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과 평강으로 인한 사랑이 구원이라는 소망을 향해 자라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알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의 소망으로 일하심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구원의 능력으로 드러난다.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다.

나는 교회의 지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다.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돈, 건강, 학력, 명예, 권력… 이것들에 얽매였다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다.

구원에 소망을 두고 은혜와 평강으로 살게 하소서.

엡 3:1-13

그리스도 예수의 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 즉 구원의 비밀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즉 ‘갇힌 자’라고 밝힌다. ‘갇힌 자’가 소위 자유자에게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의 비밀은 쉽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도 들어도 이해되지 않아서 ‘비밀 (미스테리)’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설명을 읽으면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라고 적었다(4). 에베소 성도 자신들은 비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바울이 비밀을 이해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능력이다. 구원의 비밀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은혜’다.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다. 나의 말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의 설명을 들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 알려질 것이다. 내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 덕분이다.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된다는 것, 한 교회로 하나님의 일군, 지체가 된다는 것을 어찌 말로 설명하랴.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한몸, 한 교회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은 것은 성령 안이다(2:18).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간다(2:22). 그러니 미스테리다. 비밀이다. 바람과 같은 성령이니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이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이다.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내가 받은 것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래서 내가 일꾼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한다(엡 3:7). 그리스도의 은혜로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는 표현으로 적용한다. 능력을 받아서 이방인의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서라고 한다.(8)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작은자’ (세례요한의 좌우명을 적용한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3:30 공동번역) 바울을 통해 드러난다. 바울은 또 ‘교회로 말미암아’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을 교회의 지체로서의 자격을 분명히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이다(11).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2) 이 길은 바울에게는 여러 환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알 수 있게 된 자들에게는 ‘영광’의 길이었다 (13).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나의 영광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