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막내가 결혼할 때 권면하거나 부부상담을 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이 아침에 굳이 ‘아내들’에게 하는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 사랑하니 아내를 위해 죽어야 한다.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아내로 맞이하셨다. 성자의 권리를 내려 놓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처럼 되셔서) 신부로 맞아 주셨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를 부활시키셔서 성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신부된 우리는 덩달아 사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은 교회를 깨끗게 씻기 위함이요,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죽었었고 그리스도는 그런 우릴 위해 죽으셨다. 죽었다는 (죽는다는) 것은 권리를 내려 놓는 다는 말이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흠없고 아름답게 단장하신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신다. 아내 사랑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으로 사랑하신다. 남편들아 아내를 자기 몸인 줄 알고 사랑하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찌 말로 다 이해하랴. 이 땅에서는 아내를 사랑함으로 체득해야 알 수 있다. 아내는 나의 절반이 아니다.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다. 하나다. 한몸을 이룬다. 한몸을 아내와 나로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상처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상처도 주었다. 그러나 한몸이다. 서로 붙어있는 레고 조각이다. 교회의 지체로 여기 저기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은사는 다를지라도 가정을 통해 주시는 은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하신다. 남편들이여 자기 몸을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요, 내가 죽지 않고 아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살을 꿈꾸는 것이다. 아내를 위해 죽으라고 하신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한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냥 사랑하라. 그냥 사랑하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