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2:19-3:6

에스더 2:19-3:6+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왕후로 삼았지만 성적타락의 방탕함은 멈추지 않았다. 처녀들을 다시 모았다. 이때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침  문에서 일하던 내시 두명이 왕 암살계획을 세웠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 암살계획을 밝혀낸 공로로 궁중실록에 이름을 올렸다.

‘부부유별’ 의 질서가 깨어진 제국에서 ‘군신유의’가 제대로 실천될리 없다. 앞선 암살음모도 좋은 예다. 그리고 하만이 총리자리에 오른다. 매관매직의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은 일만 달란트로 왕의 조서를 받으려 했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는 있다. 왕은 대궐 문에서 일하는 신하들에게 하만에게 꿇어 절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모르드개는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당한 모르드개. 이방신 마르독을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아픔이 어땠을까?) 개명을 당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힐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르드개가 유대인의 믿음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출신이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 살아서 모르드개는 자신만 아니라 민족전체를 진멸의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5,16)

올림픽 금메달과 같은 세계적인 업적을 성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 스토리를 써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한 답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모르드개에게도 암살음모를 밝혀 궁중실록에 이름을 올린  영광의 순간에 유대인임을 고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유대인답게 살아 고난이 왔을 때 유대인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할 때 (세상은 비방해도) 그리스도인임을 알릴 수 있다. 주일 성경들고 교회간다고 그리스도인일까? 나의 행실이 곧 나의 이름표다.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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