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9:1-19

에스더 9:1-19

오늘 본문의 삼세번은 ”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이다. 대적의 재산을 취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아예 합법화하려고 조서에 명시까지 하였다. 율법적으로 적용한다면 대적의 재산을 탈취해야 한다. 취하지 않으면 불순종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적의 재산에 손대지 않았다. (싸움의 본질을 흐리지 않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지난 에베소서 묵상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먹고 마시고 술취하고 방탕한 제국의 한 가운데 사는 유다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니 놀랍다.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가치다. 그러나

오늘 날 교회도 본질보다 잿밥에 관심있다. 고난은 믿음이 작은 결과요 (재물과 건강과 자녀가 세상에서 잘되는) 축복은 믿음이 큰 자가 받는다고 가르친다. 대놓고는 가르치지 않겠지만 교회에서도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그런 분이 대접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삼세번’이 나에게는 에스더서의 하이라이트다. 제국에서 출세하고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총리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가 아닌, 이름 없이 살아가는 (남은 자) 유다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삼세번 반복되는 단 한 줄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매스컴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볼 수 없지만 (오히려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은 나온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친구들, 생명을 위하여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잠 1:19) 성도들이다. 때로 아픈 소식이 들려와도 난 감사한다. 선줄로 생각했는데 넘어졌다는 소식만 들리지 않길 바랄뿐이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사 61:3)

에스더 8

에스더 8장

하루 해가 참 길다. 그 날에 제 발 저린 왕은 에스더에게 ‘보상’을 한다. 우선 (총리 관저)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다. 에스더가 자신과 모르드개의 관계를 밝히자 왕은 모르드개를 불러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주었다. 왕후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했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개인적인 관계는 이렇게 극적 반전으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에스더의 간청중 ‘나의 목슴을 살려주십시오’는 해결되었어도 ‘나의 민족을 살려주십시오’는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악인은 제거 되었어도 ‘악인의 꾀’는 여전히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 에스더는 다시 한번 왕에게 나가야 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은 에스더를 향해 금 규를 내 밀었다. 에스더는 하만이 쓴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왕의 조서는 철회될 수 없다. 왕은 이미 하만을 사형시키고 하만의 지위를 모르드개에 주었으니 (하만에게 주었던 어느 ‘소수민족’이든 벌할 수 있는) 조서를 왕의 이름으로 다시 쓰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 주도로 작성되었다.

조서의 내용은 유다인들에게 유다인들을 치려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진멸하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다. 하만의 조서는 근 일년 후를 바라보고 포고되었고 모르드개 조서는 하만의 조서가 발표된 후 두달정도 지났으니 아달월 (12번째 달)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아홉달 정도의 시간이 있는 셈이다. (지금부터 러시아 월드컵까지보다 더 길다.) 그러나 인도에서 구스 (아라비아반도?)까지 이메일을 보낼 수도 전보를 칠 수도 없었다. 급했다. 유다인들의 준비기간이 대적들에 비해 두달이나 뒤쳐졌던 까닭이다. (하만이 제비뽑아 정한 날도 조서를 전달하고 유다인들을 진멸한 준비를 위한 기간이 충분히 고려 되었으리라.) 왕은 이 조서를 왕의 일에 쓰는 날쌘 말들을 타고 빨리 전하도록 했다.

모르드개는 새옷을 입었다. 재가 묻은 굵은 베옷을 벗고 푸르고 흰 세마포 (가는 베 겉 옷)를 입었다. 마치 바로가 자기의 인장을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 (목걸이)를 걸고 자기 수레에 태웠던 것처럼. 모르드개는 조정 대신들이 입는 옷 (조복)을 입고 대궐에서 나왔다. 온 수산성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넘쳤다. 특별히 유다인들에게는 영광과 존귀함이 즐거움과 기쁨에 더해졌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사 61:3)

‘대신’은 ‘없이’가 아니다. 재 없이 화관이, 슬픔 없이 기쁨이, 괴로운 마음 없이 찬송이 아니라 재를 뒤집어 썻다가, 슬픔으로 애통하다가, 괴로운 마음으로 아파하다가 화관이 씌워지고 기쁨이 넘치고 찬송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 한국교회 어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바로 어르신들은 재와 슬픔과 괴로운 마음에서 화관과 기쁨과 찬송의 의의 나무가 되었다고 간증하시는데, 자기 자식들에게 재와 슬픔과 괴로운 마음이 닥치는 것을 대신 막아주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니 이해는 되나 자식들을 나약한, 쉽게 시들어 말라버리는 나무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성공으로, 자신들의 신앙으로 자식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불신’이 오늘 한국교회의 화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술취함과 방탕함의 제국 백성들 중 이참에 유다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먹고 마시는 나라 백성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멀리 한국에서 들리는 소식은 오히려 가나안 성도가 는다고 하니… 교회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잃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교회가 제국을 닮아간다. ㅠㅠ

토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