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9:20-10:3

에스더 9:20-10:3

부림절. 이스라엘이 오늘날에도 지키는 가장 큰 명절중의 하나라고 한다. 부림절이라는 이름은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할 날 아달월 13일을 ‘부르’ (주사위의 일종)를 던져 정했는데, 유다인들이 대적을 물리치고 이 ‘부르’라는 주사위의 이름을 따서 부림절이라고 불렀다. (9:26)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찬양도 기도도 한줄 나오지 않는다는 에스더의 유다인들. 맘몬신을 모시고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사는 사회에서도 저들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다. 박수와 술객 무리는 하만 앞에서  365분의 1의 확률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으나,이 날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은유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승전일도 독립기념일도 아니고 악한 하만이 던진 ‘부르’ 주사위를 비웃는 절기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다.)

모드르개는 대적을 물리친 기쁨의 날, 잔치의 날인 14, 15일 부림절을 규례로 정해 지키라고 명했다.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9: 21,22)

부림절은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특별히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잔치는 (파티와 다르게) 가진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온 공동체가 즐겨야 한다. //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는 성경의 일관된 가름침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도 가난한 자를 구제함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는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너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 하셨다. (눅 12:31-33) 술취함과 성적타락의 방탕함이 난무하는 맘몬신을 섬기는 이 악한 때에도 적용해야 하는 세월을 아끼는 방법중 하나일 것이다.

부림절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 없는 당시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사람들이 세상일을 주관하는 것 같으나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였고, 세상은 만몬신을 따르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였다.

모르드개에서 그치지 않고 에스더까지 한번 더 온 유다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부림절을 지키라.’ 두번째 편지에서는 잔치대신 금식을 명하였다. 부림절(대적을 물리침)이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심하고 수산성 온 유다인들에게 금식하며 하나님께 함께 부르짖어 달라고 모르드개에게 명하였고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라는 순종의 결과임을 상기 시킨다. 결코 대적을 물리친 승전의 기쁨에만 취하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라고 직접적으로 말못하지만 유다인에게 금식은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에스더서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이름조차 맘대로 부를 수 없었던, 소수민족으로 창씨개명하고 살아야했던 그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준다. 내가 사는 프놈펜도 술취함과 성적타락으로 방탕한, 맘몬신을 섬기는 땅이다. 불교국가니 그리스도인은 소수민족이다. ‘악한 꾀’가 언제든지 위협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모르드개나 에스더 같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많아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술집만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