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3:7-15

악은 더 큰 악을 낳는다.

하만은 모르드개 한사람을 죽이려고 했다가 유다인 전부를 진멸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에게 조서를 받을 때에는 다른 소수민족도 위협할 수 있게 더 악해졌다.

하만이 어떻게 총리의 자리에 올랐을까? 많은 돈으로 매관매직했을 수 있다. 그런데 또하나의 힌트가 7절에 숨어 있는 것 같다. 유다인을 진멸할 날을 받는 장면이다. 무리가 하만 앞에서 제비를 뽑아 날을 받았다. 그렇다면 하만은 박수의 우두머리였을 가능성이 있고 점꽤로 왕에게 접근하여 왕을 꾀였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니 패전한 왕을 혹하게 하기는 더 쉬웠을 것이다.)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다니엘이 총리도 발탁된 것도 저들의 입장에서는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은 일만달란트 (무게로 따져도 350톤쯤 된다는데)를 움직일 수 있는 재력을 가지려면  무속인의 우두머리가 아니였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모르드개가 굳이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은 이유도 조금은 더 이해가 된다.  하여간 악은 더 큰 악을 낳는다.

하만은 아하수레로 왕을 꼬득인다. 유다민족이라고 꼭집어 말하지 않고 한민족이 왕에게 무익하니 진멸하라는 조서를 내려달라고 청했다. 혹시나 해서 (조서를 집행하는데 필요한) 비용, 은 일만달란트를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미 판단력을 잃은 왕은 조서의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반지를 빼서 하만에게 주며 소견에 옳은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제 하만은 원한다면 유다인뿐 아니라 어느 소수민족도 진멸할 수 있는 권리를 산것이다 다름 없다. 모르드개 한명에서 유다인 전체를 진멸하려는 계획이 다른 소수민족도 원하면 위협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게된 것이다.

개역개정 본문은 조서 내용을 ‘모년 모월 모일 하루동안 유다인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라’라고 간단히 적고 있지만 공동번역에서는 +++ 아래와 같이 풀버전의 조서 내용을 담고 있다.

아하수레로 왕이 읽었을리 없다. 읽어도 자신을 찬양한 앞부분을 일다가 멈췄을 것이다. 하만은 앞에서 자신이 이인자인 것처럼 시작했지만 뒤에 가서는 ‘공직의 제 일인자이며 왕에게는 제이의 아버지인 하만’이라고 왕 위에 자신을 두는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조서 어디에도 유다인을 꼭집어 명시하지 않았다. 어느 소수민족이나 ‘유별난 이민족’이  될 수 있다. 하만이 편지속에 지적한 자들이라고만 적었다.

이 조서는 전국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었다. 모르드개만, 아니 유다인만 혼돈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 29:2하)

악인의 꾀를 따르며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의 전형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다. 정결한 마음을 주소서.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

((13_1)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왕 아하스에로스가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백이십칠 개 주의 통치자들과 그 예하 지방장관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13_2)수많은 국민들을 통치하며 온 세계를 지배하는 나는 결코 오만스럽게 권력을 남용하지 아니하고 절도를 지키며 관대하게 다스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백성들에게 파탄 없는 평온한 생활을 영원히 보전하여 주며, 나의 왕국에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문명의 혜택과 방방곡곡 어디에든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며, 모든 백성이 열망하는 평화를 이룩하고자 한다. (13_3)그런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두고 나의 자문관들과 협의하였다. 자문관들 중에 하만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총명하기가 우리 중에 뛰어났고 그의 꾸준한 정성과 변함없는 충성심이 증명된 사람이며 그 지위는 나 바로 다음가는 사람이다. (13_4)그 하만이 다음과 같은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즉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부족 가운데 한 못된 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데 그들은 모든 민족을 적대시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왕명을 거역하여 온 백성의 복리를 보장하려는 나의 통치를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13_5)그러므로 유별난 이 민족이 온 인류와 사사건건 충돌하며 괴상한 법제도를 가지고, 우리 나라의 이익을 해치며 극악한 범죄를 저질러 마침내 이 왕국의 안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생각하고, (13_6)나는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공직의 제일인자이며 나에게는 제이의 아버지인 하만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지적한 자들은 금년 아달월 즉 십이월 십사일을 기하여 여자나 어린이를 가리지 말고 인정사정 없이 그들의 원수의 칼로 모조리 없애버리라. (13_7)그리하여 어제도 오늘도 우리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단 하루에 힘으로 지옥에 몰아넣고, 앞으로 이 나라가 안정과 평화를 완전히 누리도록 하라.”)

에스더 2:19-3:6

에스더 2:19-3:6+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왕후로 삼았지만 성적타락의 방탕함은 멈추지 않았다. 처녀들을 다시 모았다. 이때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마침  문에서 일하던 내시 두명이 왕 암살계획을 세웠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 암살계획을 밝혀낸 공로로 궁중실록에 이름을 올렸다.

‘부부유별’ 의 질서가 깨어진 제국에서 ‘군신유의’가 제대로 실천될리 없다. 앞선 암살음모도 좋은 예다. 그리고 하만이 총리자리에 오른다. 매관매직의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은 일만 달란트로 왕의 조서를 받으려 했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는 있다. 왕은 대궐 문에서 일하는 신하들에게 하만에게 꿇어 절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모르드개는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당한 모르드개. 이방신 마르독을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아픔이 어땠을까?) 개명을 당해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힐 수 있었을까?  그러나 모르드개가 유대인의 믿음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만에게 꿇어 절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 떳떳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출신이 유대인이어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 살아서 모르드개는 자신만 아니라 민족전체를 진멸의 위기에 빠뜨린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5,16)

올림픽 금메달과 같은 세계적인 업적을 성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 스토리를 써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의를 위하여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한 답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모르드개에게도 암살음모를 밝혀 궁중실록에 이름을 올린  영광의 순간에 유대인임을 고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유대인답게 살아 고난이 왔을 때 유대인임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할 때 (세상은 비방해도) 그리스도인임을 알릴 수 있다. 주일 성경들고 교회간다고 그리스도인일까? 나의 행실이 곧 나의 이름표다.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에스더 2

크세르 크세스.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은 “영웅들의 지배자” 라는 뚯이라고 한다. 즉 강자중의 강자다. 그러나 술취한 왕은 부부유별의 제국을 남존여비 여필종부의 졸국으로 만들었다. 아하수에로 왕은 이것을 타개하고자 그리스를 침공하였으나 승승장구하던 전쟁은 살라미스 해전의 참패로 끝난다. 내치와 외치에서 실패했으니 그의 노여움이 어떠했을지… 시간은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2장을 연다.

그러나 세상 지혜자들은 술취함으로 윤리를 남존여비 여필종부로 퇴락시키더니 성적방탕으로 바닥을 치게한다. 왕을 ‘아리따운 처녀’로 취하게 했다.

왕비 선발의 기준이 ‘아리따운 처녀’ 였다. 왕의 눈에 드는 아름다운 처녀’. 에스더는 ‘ 아리따운 처녀’들 중 하나였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처녀’라는 표현이 세번이나 반복된다. 육신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가치를 그대로 반영한다.

눈에 띄는 아름다운 처녀 에스더는 유대에서 포로로 잡혀왔던 베냐민 자손의 후예 모르드개의 (딸처럼) 나이어린 사촌동생이었다. 모르드개, 에스더 모두 창씨개명한 이름들이다. 개명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출신성분을 떠버리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보아 왕따민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포로로 잡혀 온 민족이어서라기 보다는 창씨개명 말고는 도무지 섞이지 않는 물에 기름같은 민족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삶이다.) 모르드개나 에스더 두 이름은 이방신과 관련된 이름이다. 자신들의 본질과 전혀 다른 이런 이름을 가져야 했던 아픔은 또 어땠을까?

타락한 제국에서 하나님의 눈에 드는 두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존재는 달 빛조차 없는 깜깜한 밤하늘을 홀로 비추는 별이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은총을 입어 왕비가 된 것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성경의 주인공이 된 것이 더 크고 놀라운 일이다. 제국의 타락과 아리따운 처녀 에스더의 빛남이 대조된다.

성적타락의 불야성에서는 별보기가 쉽지 않다. 대형교회의 타락과 대조되는 은혜입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지길 간구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그립다.

에스더 1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롬 14:17)

에스더서 저자는 먹고 마시는 나라의 극치로 서문을 연다. 인도에서 구스 (아라비아반도) 까지 180일간의 잔치, 그리고 7일간 이어지는 왕궁잔치. 아름다움과 질서까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날 왕이 취하기 전까지였다. 아니 온 성이 취했다.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하수에로 왕이 취하기 전에는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었고 부부유별의 질서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게 한순간에 무너져 결국 술취함과 남존여비의 나라로 전락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이 빠진 그냥 먹고 마시는 나라가 되었다. 세상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한계다. 세상 지혜자들의 한계다.

이렇게 삼강오륜이 깨어진 취함의 나라에 에스더는 등장한다.

세상잔치는 끝났다. 영원하지 않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법이 깨어지고 재물에 취한 나라에 살고 있다.

공동번역 1절은 ” 모르드개는 꿈에서 깨어나, 자기가 꾼 꿈과 그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생각하며 온종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라고 맺는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엡 6:10-24

주 안에서

주 안에 있는 것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막연한 표현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명령으로 설명한다. 주 안에 있는 것, 새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하는 것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것이다. 옛사람의 습관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이기기 위함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빈틈이 보이는 육적인 초보자가 아니라 고단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 막후의 영적 실세들이다.

// 그래서 온몸을 보호해야 한다. 군인으로 말하자면 완전군장을 해야 한다. 얼마전 전역한 이승기가 30킬로 군장을 메고 400킬로미터 천리행군을  했다고 한다. 육군의 완전군장무게는 50킬로에 육박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기능이 중요하다. 세상의 악한 가치와 맞서 하나님나라에서 설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겁다고 벗어놓고 다녀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스릴갑옷처럼 가벼우니 항상 입어야 한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보호대,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

그러나 완전군장을 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낙오하지 않아야 한다. 믿음의 여정을 완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군대열에서 떨어져서는 안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기도와 간구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바울은 반복해서 에베소 성도들을 일깨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 여러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울의 기도요청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의 적용이라고 생각된다. 완전군장을 했어도 개인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주어지 임무에 따라 더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일을 하다가 갇힌 자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위해 기도요청을 한 것이다. ‘담대히’라고 두번이나 강조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도 두기고를 통해 알려 주겠다고 적는다. 막연한 기도요청이 아니라 사정을 알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전신갑주는 성도 개인이 입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입는 것이기도 하다. // 교회가 전신갑주요, 주님이 전신 갑주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

편지는 ‘은혜와 평강’ 순서를 바꿔 마친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