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6:1-9

주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뜻이요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들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주 안에서’는 누가 높고 누가 낮고 따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공경해야 한다.  3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는 말씀은 이 아침에는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는 데 필요한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부모님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불효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명령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신다. 달리말하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으면 자녀를 노엽게 하게 된다는 뜻일 수 있다. 바른 부모가 되기위해서도 주님을 더 잘 알아가야 한다.

종들도 주 안에서는 상전보다 낮은 자가 아니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하고 상전들도 주 안에서 종들보다 높은 자가 아니니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종과 상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들의 원리를 적용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결국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 안에서’행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계속 강조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라고.

 

엡 5:22-33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막내가 결혼할 때 권면하거나 부부상담을 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이 아침에 굳이 ‘아내들’에게 하는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 사랑하니 아내를 위해 죽어야 한다.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아내로 맞이하셨다. 성자의 권리를 내려 놓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처럼 되셔서) 신부로 맞아 주셨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를 부활시키셔서 성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신부된 우리는 덩달아 사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은 교회를 깨끗게 씻기 위함이요,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죽었었고 그리스도는 그런 우릴 위해 죽으셨다. 죽었다는 (죽는다는) 것은 권리를 내려 놓는 다는 말이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흠없고 아름답게 단장하신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신다. 아내 사랑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으로 사랑하신다. 남편들아 아내를 자기 몸인 줄 알고 사랑하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찌 말로 다 이해하랴. 이 땅에서는 아내를 사랑함으로 체득해야 알 수 있다. 아내는 나의 절반이 아니다.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다. 하나다. 한몸을 이룬다. 한몸을 아내와 나로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상처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상처도 주었다. 그러나 한몸이다. 서로 붙어있는 레고 조각이다. 교회의 지체로 여기 저기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은사는 다를지라도 가정을 통해 주시는 은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하신다. 남편들이여 자기 몸을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요, 내가 죽지 않고 아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살을 꿈꾸는 것이다. 아내를 위해 죽으라고 하신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한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냥 사랑하라. 그냥 사랑하라. 사랑하라.

 

엡 5:15-21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사랑을 받은 자, 주 안에서 빛인 자들에게 바울은 명한다. 지혜 없는 자가 어리석은 자요 어리석은 자가 술 취한 자 일 것이니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하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시간을 아끼는 것과 다르다. 무슨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멀티타스킹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더 빨리’와 ‘더 많이’를 추구하게 만드는 악한 시대 정신에 따라 살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을 투자해서 (손해 보더라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악한 시대 정신에 세상을 팔아먹지 말고 ‘다시 사라’는 명령이다. 나 자신만, 우리 자녀만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앞설 수 있다면 악한 세상에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쟁심이  우리를 사로잡지 않도록 해야한다. 오 어리석도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주의 뜻은 주어졌는데 사람마다 자기가 이해한대로 해석하는 세상이다. 물론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적용한다. 예수님은 전통과 관습으로 이해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헬라인들은 헬라철학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문화에 취해서 이해한다. 술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하여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친히 알려 주셨다. 성령의 도우심을 너머 ‘충만’해야 한다고 하신다. 악인의 꾀가 끼어들 틈조차 없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순종함으로 유지한다. 함께 모여 시편도 읽고 찬송도 부르고 진실된 마음으로 주신 주의 뜻을 찬양해야 한다.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방법이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삼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성도들간의 복종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충만은 다른 성도에 대한 나의 복종으로 열매 맺는다. 겸손하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지어져 가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성도간에 복종해야 할 이유다.

엡 5:8-14

주안에서 빛이라

간단 명료. 어둠이 갑자기 빛이 될 수 없다. 더이상 어둠이 아닌 이유는 빛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께 나오면 더 이상 어둠이 아니다. 주안에서 빛이다.

새사람을,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 안에 있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따르는 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이다.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라는 성품은 개인의 성공? 보다 공동체를 이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는 것도 그 목표가 개인적인 성취보다도  공동체의 유익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가기위한 목표라야 한다.

어둠의 일, 주안에서 하지 않는 일에는 열매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면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라 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책망해야 한다. 어둠 가운데 은밀히 행하는 일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책망은 부끄러운 일을 드러내는 것이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빛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거부하고 정죄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21)

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 빛인 이유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있을까 ? 부, 건강, 출세, 자녀의 형통, 교회의 직분, 많은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야 말로 주를 기쁘시게 한다.

나의 부끄러움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엡 5:1-7

사랑을 받은 자

새사람을 입은 자,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는 사랑을 받은 자다. 요셉에게 채색옷이 입혀졌듯이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이 입혀졌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새사람, 그리스도로 옷입혀졌다. 그러니 사랑받은 자다.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받은 자녀는 부모를 본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바울도 성자하나님을 본으로 삼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우리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가장 큰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기위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양도 버려야하고 음담패설을 입에도 담지 않는 것이 성도에게 마땅하다. 대신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우상숭배다.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그리스도로 옷입힐 수도 없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새사람을 입은 사람이 아닌 불순종 하는 사람들, 옛습관을 따르는 사람들, 결국 우상숭배자들이다. 이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뜻이니 동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심판대에 설 때 오른편 양에 속하고 왼편 염소무리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줄을 잘서야 한다. 어렵지 않다.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면 쉽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선한목자의 소리를 따라가면 된다.

선한목자의 음성을 아는가?

 

//사족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들이 너의 흰 빛 시샘하니
맑은 물에 깨꿋히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 모친이 지은 ‘백로가’를 현대문으로 옮겼다. 이성계를 방문하지 말라고 모친이 부른 노래라고 전해진다. 방문울 마치고 돌아오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하여가’ 에 ‘단심가’ 로 답하고 결국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다.

요즘 세상가치는 이방원 편이 우세한 듯하다. 그러나 내가 충성해야 할 (본받아야 할) ‘임’ 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