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25-32

새사람을 입는다.

새사람을 입은 줄 어떻게 알까? 바울은 그 증거로 교회의 지체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새사람을 입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새사람은 속임이 없고 진실하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5:17)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한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결국 ‘그러므로 주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새사람을 입은 구체적인 증거는 죄를 짓기까지 분내지 않으며,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옛습관을 버릴뿐 아니라 선한 일을 도모한다. 도둑질 하던 자는 구제하기 위하여 열심히 선한 일을 한다, 악담을 즐기던 자는 선한 말로 은혜를 나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던 자는 하나님의 뚯대로 근심하여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서로 친절, 서로 자비, 서로 용서한다. 바울은 새사람을 입는 것을 개인적 /성/품/이 변화하는 것만이 아닌 /삶/이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 학생들과 선생님들 교복을 맞추었다. 재단사가 와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몸 치수를 쟀다. 상의 셔츠 하나를 만드는데 열군데 이상 쟀다. 그래도 몸에 딱 맞지 않을게 뻔하다. 나는 그냥 100사이즈 반팔 셔츠 하나를 가져와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할 예정이다. 나는 옷을 입지 않고 걸친다. (사람들이 나라는 옷걸이가 좋다고 하는 이유가 입지 않고 걸치기 때문인가? ㅠㅠ) 그러나 새사람을 입는 것은 우리 몸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고 삶이라는 옷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사람이라는,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내몸에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몸에 꽉 낄 수도 있고 헐렁헐렁해서 쉽게 벗겨 질 수 도 있다. 내 스타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에게 딱 맞는 옷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세상이라는 울퉁불통한 거울에 비춰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주안에서’라는 안경을 끼고 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2,3)

우리 학교는 매주 수요일이 교복입는 날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매일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게 하소서.

엡 4:17-24

그러므로 주안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그러므로 주안에서’라는 안경을 끼고 에베소 성도를 본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방인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한다.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한 몸, 즉 교회의 지체다. 그러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이방인일 수 없다. 이방인은 생명이 없는 우상처럼 된다. 감각없는 자가되어 욕심을 따라 행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우상이) 아니다. 대신

그리스도는 진리시다. 성도는 이방인과 다르게 진리를 듣고 진리 안에서 배운다. 진리가 아닌 옛습관을 따르면 옛사람 그대로다. 여전히 이방인이다. 바울은 은근슬쩍 육체의 할례도 옛습관을 따르는 것임을 지적하듯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옛습관을 따르면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마음에 할롈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이다.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입는다!

나는 흰 옷을 입은 날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하얀 새 옷을 입은 날에 꼭 누군가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한다. 염려했던대로 짜장 얼룩이 묻어서 집에 온다. 아무리 조심해도 짜장면 먹고 검뎅이 자국 없이 집에 온 기억이 거의 없다. 입가에 묻은 것은 닦으면 되는데 옷에 묻은 것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 새옷이 헌 옷이 된다. 이렇듯 새사람을 입어도 옛사람이 되기 쉽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새사람을 입는 것을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7)라고 표현한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유니폼을 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복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한다.

흰 옷을 입으면 짜장면이 묻을까 조심하는데 그리스도로 옷입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할까!

엡 4:1-16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충만함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름을 받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이다. 이것을 에베소 성도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였다.

그러므로 ‘갇힌 자’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힌’자라로 소개한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자라고 이미 소개 했었다. 결국 바울은 ‘교회 안’과 ‘그리스도 예수 안’ (3:21)에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로마 감옥에 있지만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의 권면은 에베소 성도들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잘 설명한 구절은 2장 22절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요, 성도들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함으로 감당할 수 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 (통일)이다. 건전한 지체의식은 반드시 필요하나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인, 한 믿음, 한 세례, 한분 하나님으로의 통일을 강조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이유다. 분량이 다르다. 참 어려운 표현이다.

분량이 다르다는 것은 그릇으로 지음 받은 각 사람의 용량이 다르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릇으로 지음받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릇 가득’ 은혜를 주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릇 가득’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팔아야 보화가 감추인 밭을, 값비싼 진주를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7절에서 11절로 이어지는 게 편하다. ㅋ)

그릇에 따라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의 은혜가 부어졌다. 그릇에 따라 은혜가 부어졌으니 그릇을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은혜부음의 주권이 있다. 각 사람이 내가 사도 그릇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다시 돌아가서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물리적 건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조각’이 되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레고’처럼 빈틈없이 조각들이 만들어진 곳에 결합되는 것이다. 메뉴얼 대로 레고를 조립하지 않으면 원래 의도했던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메뉴얼 없는 오래된 레고 조각들로 이런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의도했던 작품은 분명 아니다. 사람의 속임수에 불과 하다. 이것을 창의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속임수요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다.

하나님께서는 레고 한조각 한조각이 어디에 정확히 조립되어야 할 지 아신다. 그 조각 역할을 하는 것이 참된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 교회로 자라는 것이다.

레고조립을 생각하라. 조각은 자신이 놓여질 자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그냥 조각들 속에 묻혀 있어야 한다. 조각들은 다른 조각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 위치에 조립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이미 조립된 누군가와 연결되고 결합되어 존재한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다. 교회의 지체로 조립되기 위하여 누군가가 레고처럼 나의 일부 혹은 전부를 가리면서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다. 나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런 위치에 박혀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게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길이다. 다른 지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이 교회다.

(오늘은 본문이 좀 길다. 이렇게 이해하면서 적어가는데만 한참. 레고회사에 감사)

레고 조각이다. 어디에 꽂혀야 할 지 깨닫게 하시고 다른 성도들이 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도록 나는 더 작아지게 하소서. 아멘

 

 

 

엡 3:14-2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특권중 하나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하면서 그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대신에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  친밀하게 아신바 됨을 뜻한다. 그러나

기도는 개인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얽매주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성령 안’에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는 머리시지만 결국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성부하나님으로 성자 예수님으로 성령하나님으로 우리가운데 거하심이 사랑이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심기우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분을 공급받는 다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개인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로 뿌리도 얽히고 줄기도 얽힌다. 그래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너비 길이 높이 깊이. 4차원이다. 그래서 단순히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이해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 능력이 아니다. 이 능력이 우리 가운데 거하는 것이 은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은혜를 누린다. 그래서 결국 바울의 기도는 능력의 하나님께 영원한 찬양을 돌리는 것으로 기도를 마친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온전한 찬양을 할 수 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은 결코 개인적인 기도제목들이 아니다. 교회를 이뤄가기 위한 기도제목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위한 기도제목이다. 교회를 위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개인적인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는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저의 개인적인 모든 욕심과 자랑은 배설물로 버리게 하소서. 아멘

[엡3:14-21]

엡 2:-22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자여 평안을) 생각하라! [엡2: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평강(화평)을 누리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 둘이 한 몸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과 평안(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언약 백성이 아니어서 세상에서 소망도 하나님도 없었다(12). 유대인은 율법에 갇혀있었다 (15). 결국 할례와 무할례자 사이의 막힌 담은, 둘 모두 하나님과도 원수되게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먼데 있는 무할례자, 가까이 있는 할례자에게 평강(평안)을 (은혜로) 전해주셔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성령 안에서’ 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방법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 ‘성령 안에서’의 초석이다. 은혜로 구원받음은 하나님과 성도 (심지어 원수 사이였다 할지라도)간의 평안이다.

‘오직 은혜’ 는 평안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삶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순간까지만 (은혜만) 기억하고 감사해서는 안된다.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오직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