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7:3-20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4)]

오늘날 한국교회는 굶주림이 있는 성읍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은 안다. 교회에 간들 굶주림이 있으니 교회에서 죽을 것이다. 그냥 죽기 싫은 그들은 결국 맘몬에 항복한다. 맘몬이 죽이든 살리든 ‘케세라세라’.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다. 긍정적이다. 악한 세상도 (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맘몬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릴 수 없다. 그래서 굶주린 교회는 교회밖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상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닫고 불신앙을 고집하면 결국 죽는다.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 갇혀 말씀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굶주림의 신앙 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웃사랑이 없으면 성도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갈 것이다. 그러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문에서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9)]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나병환자들은 교회 밖에서도 맘몬 대신 주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기로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랴.

죽으면 죽으리라!

열왕기하 6:1-7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쇠도끼 이야기.

예언자 수련생 (선지자 제자들) 중 하나가 수련원 증축을 위해 요단강 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빌려온 쇠도끼를 요단 물에 빠뜨렸다. 도끼를 빠뜨린 수련생이 함께 일하러 왔던 엘리사를 향해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다고 하자 엘리사는 어디에 빠졌는지 묻고, 그 위치를 보고받자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으로 쇠도끼를 건져주었다.

선지자의 동행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생긴다. 그러나 선지자의 동행으로 제자는 문제를 바로 보고할 수 있고 선지자도 문제의 근원을 바로 알 수 있다.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은 물론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열왕기의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도끼가 빠진 위치를 확인할 때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리라고 불렀다.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5

나아만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의 주인은 아람 왕이었다. 자신의 나병을 낫기 위해서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편 그 자신도 여럿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깨끗이 낫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돌아와 ‘당신의 종’ 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열왕기 기자는 철저하게 엘리사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기록해서 나아만의 주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강조한다.

나아만의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아람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주인은 주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나병환자에서 평안의 삶을 산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종들에게도 경청한 (온유한) 나아만은 노새 두마리에 실을 흙(땅)만 받았지만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다.

또 한사람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주인도 맘몬으로 바뀌었다. 맘몬을 주인으로 바꾸자 평안 대신 거짓이 게하시를 주장했다. 결국 게하시는 나병환자로 살게된다.

평안하냐? 고 물으신다.

열왕기하 5:1-14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을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라고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나아만을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소개한 것이다.

주인이 (아람왕이) 나아만을 크고 존귀한 자로 세워준 이유를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또한 주 하나님의 섭리아래 이루어졌음을 빼먹지 않았다.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나아만은 종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하는 마음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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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 만큼이나 아래로부터 듣는 것도 중요하다. 여종의 이야기를 나아만이, 나아만의 이야기를 아람왕이 들어주었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

나아만에게는 충성해야 주인인 아람 왕이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경청했을 것이다.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으로 아람 왕에게 존귀함을 받았다고 기록하면서,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빼먹지 않았다.

나아만의 경청하는 성품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아온 여종의 이야기도 경청했다. 이 경청하는 성품이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을 낫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는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의 말도 경청한다.

 

열왕기하 4:44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3,44)

머리 속의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한참 걸린다. 가슴으로 내려온 믿음이 손과발로 전달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내가 먹고 남기고 창고에 쌓아두는 생명없는 삶이 아닌 그들이 (이웃이) 먹고 남기는 생명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좋지 않은 (독이든) 먹거리도 몸에 좋게 바꾸실 것이요, 적은 양의 먹거리도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