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1-13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해져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로 강해지라고 한다. 은혜만이 우리를 강하게 할 수 있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해지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임명을 받았다고 자신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디모데에게 말했었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받은 거룩한 부르심을 디모데에게도 적용한다. 아니 디모데가 가르칠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한다. 디모데야 내가 가르쳐 들려준 것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증인들이 있다는 것을 너도 알지)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해라. 그러면 그들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군인답게 고난을 함께 달게 받으라고 한다. 복음과 함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복음을 위한다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 살아간다고 달리 표현한 것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자기 일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바울은 운동선수는 규칙대로 경기를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5)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그리스도 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법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법을 굽게 하셔서 자신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듯이 말하기도 한다.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못한다고 하실 것이다.

바울은 군인, 운동선수에 이어 농부에 비유한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 수고한 농부가 먼저 소출을 받는다는 것은 수고한 농부가 큰 많은 소출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고한대로 소출을 받는다는 뜻이다. 믿음의 농사는 뿌린대로 거둔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잘 새겨 들으라고 한다.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보혜사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늘 구하라는 권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대로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 이것이 복음이라고 강조한다. 바울 자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대로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이 복음 때문에 죄수처럼 감옥에 갇힌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복음 자체는 감옥에 갇혀있지 않고 선포되고 전해지고 가르쳐진다고 디모데에게 밝힌다.

바울 자신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더라도 하나님 말씀인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에 바울은 이 고난을 참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고 가르쳐,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기를 바라는 것이 바울로 하여금 고난을 달게 받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와 함께 살아났다. 이 말씀이 믿을 만하다고 한다. 다시말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지만 이미 부활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디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의 권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하면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해서 그렇지 주님은 신실하시다. 주님이 신실하시듯 주님의 약속도 언제나 신실하다.

// 운동경기를 하는 사람은 규칙대로 하지 않은면 월계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5)  세상법을 지키며 사는 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가?

 

디모데후서 1:9-1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다. (9) 이것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어야 하는(8) 이유다. 구원해 주시고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셨다는 것이다.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실은 죽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시는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이 은혜는 이미 (영원) 창세 전에, 즉 다시말해 시간 세계가 있기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계획된 것이다. 이 은혜의 계획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밝히 드러났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이 곧 복음이요 생명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임명을 받았다고 구원받은 자신의 거룩한 부르심, 즉 바울 자신의 소명을 디모데에게 말한다. 바울 자신은 이 소명을 따라 살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난받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한다. 자신을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신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그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이룰 수 있도록 지켜주신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아들같은 디모데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바울 자신이 가르쳐준 말씀을 따라 살라고 권면한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께서도 도우시는 일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맡겨진 거룩한 부르심, 즉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을 지켜야 한다. 이 순종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두 사람의 이름까지 디모데에게 들먹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아니다. 바울과 함께한 사람도 있다. 오네시보로. 바울 정도가 되면 주님의 힘으로만 살 것 같은데 오네시보로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는 여러번 나에게 용기를 붇돋아 주었다고 한다. 그도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에 와서도 자신을 만나 주었다고 한다. 바울은 오네시보로 집에, 오네시보로에게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자비를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오네시보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디모데와 나눈다. 바울은 디모데 역시 에베소에서 행한 오네시보로의 봉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구원받은 자,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진 자는 거룩한 부르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로 죽는 것이다. 아기가 모태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이라면, 거룩한 부르심은 아기가 울고 스스로 호흡하고 자라는 것이다. 아기가 모태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호흡하지 못하면 결국 사산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맡겨주신 거룩한 부르심, 선한 것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살아도 죽은 것이다.

디모데후서 1:1-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대학생 때 어느 여름수련회 주제였다. 어느 종교가 고난을 받으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떤 종교가 함께 어려움을 겪자고 제안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그런 종교는 없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도 결코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 것 같다. 수련회 주제처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를 설교한다고 해도 그 고난은 복의 과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은 복음도 아닌 복만 남는다.

바울은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함께 어려움을 겪자고 권면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결과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인생에 고난이 닥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누구나 고난을 피하고 싶어한다. 종교를 고난의 도피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바울은 아들같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 왜냐하면 주의 일에 동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한다. 바울은 이 약속을 붙잡았기 때문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길, 사도의 삶을 산다.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도 유언으로 이 생명의 약속을 상속하는 것이다. 편지지만 유언장이나 다름없다. 바울은 자신이 누렸던, 누리고 있는, 그리고 영원히 누릴 은혜와 긍휼과 평강으로 편지한다.

바울은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가?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대를 이은 믿음을 감사한다. 디모데가 조상으로부터 받은 믿음, 즉 청결한 양심과 눈물의 기도와 거짓없은 믿음을 생각하며 감사한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 믿음이 디모데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감사한다. 바울은 이것을 디모데가 바울 자신의 믿음도 상속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이 상속하고 싶은 믿음은 청결한 양심과 눈물의 기도와 거짓없는 믿음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믿음을 더하는 것이다. 한발 더나아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

지난 달 울 첫째 아들 고등학교 졸업 만찬에서 나는 아들에게 손해봐라, 낮아져라, 겸손해라,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편에서라,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와 동생들을 사랑하면 세상을 (천하를) 얻게 된다고 권면했다. 솔직히 나는 이것들을 아들에게 상속할 위인이 못된다. 그러나 울 아들은 ‘복음을 위한 고난’을 상속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7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