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5:8-3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에 보내 예루살렘을 접수한다. 성전과 왕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다 불살랐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옥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성벽도 헐어버렸다. 바벨론에게 항복한 자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다만 비천한 자들을 남겨 포도원을 짓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갈대아 사람, 바벨론 군대는 성전의 기물들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큰 것들은 깨뜨려 쪼개서 가져갔다. 놋이란 놋은 다 쓸어갔다. 금은으로 만든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바벨론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인가?) 무리들도 있었다. 대제사장 스라야, 부제사장 스바냐, 성전문지기 세사람과  군사를 거느린 내시, 왕의 시종, 징병관 등등 육십명. 이들은 바벨론에 잡혀 왕에게 끌려가 다 죽임을 당했다. 결국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다. 유다에는 비천한 자들과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정책적으로 남긴 사람들만 남았다. 느부갓네살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로 하여금 유다 땅에 머물며 남은  백성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우리 역사에 빗대면 사반의 가족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주화파에 해당한다.)

그달리야는 자신에게 나온 군대 지휘관들, 이스마엘, 오하난, 스라야, 야아사니야 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화파가 있으면 척화파가 있게 마련이다.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 사관은 앞에서는 느다니야의 아들이라고만 적었는데 여기서는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라는 수식어를 첨가했다. (이참에 왕이 되고자 했을까?) 이스마엘이 부하를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죽이고 함께 있던 유다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대세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이기랴.) 그리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척화파) 백성들과 군대 지휘관들은 모두 애굽으로 도망갔다.

사관은 바벨론에 잡혀갔던 유다 왕 여호야긴이 복권?되어 바벨론 왕 에월므로닥과 함께 먹었다는 기사로 열왕기를 맺는다. 종신토록 바벨론 왕에게서 매일의 쓸 것을 받게 된 여호야긴의 복권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세상적 지위의 회복에 촛점을 두면 이보다 서글픈 일이 있을까? 베벨론을 섬기라, 그러면 너희가 평안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 유대인으로 바벨론을 섬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에스더서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열왕기하 24:8-25:7

여호야긴.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선은 대를 잇기가 힘든데 악은 정말 잘 넘어간다. 여호와 보시기에 계속 악을 행하자 주님은 바벨론으로 다시 심판하신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직접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야긴을 잡아갔다. 느부갓네살 왕은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집어내고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 하였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 특별히 지도자, 용사, 장인, 대장장이 등등을 포로로 잡아 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만 남았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 그러니깐 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를 (이름 뜻 여호와의 선물) 대신 왕으로 삼고 이름을 시드기야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바꿔버렸다.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도구로써 유다를 심판했다.

이쯤되면,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을 통해 뭔가를 배웠어야 할 시드기야가 아닌가? 그런데도 시드기야도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주님대신 바벨론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애굽을 의지한 것이다. 사관은 주님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으로 주님 앞에서 쫓아내실 때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예루살렘은 이년을 못버텼다. 예루살렘 성에 양식이 떨어졌다. 성벽이 파괴되자 시드기야는 밤중에 성을 버리고 아라바 길로 도망 쳤으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여리고 평지에서 잡혔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는 두눈을 빼고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 떠오르는 생각

//1 성전은 금광인가? 앗수르에게 퍼주고 애굽에게 퍼주고도 뭔가 남은 게 있었나보다. 엉뚱한 비유를 든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 퍼주고 또 퍼주어도 또 퍼줄 사랑이 있는 곳. 그런데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이름뿐이 교회는…

//2 비천한 자만 남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시 41:1)

//1+2 교회는 퍼주고 퍼주고 또 퍼주어 가난해져야 한다. 먹고 마시는 세상나라가 아닌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가 교회 것이기 때문이다.

//3 주님은 느부갓네살을 통해 여호와의 선물 (맛다니야)를 여호와의 의로움 (시드기야)로 개명시켰다.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으면 의롭게 사는 것이 은혜를 누리는 길이다. 의로움 없이 은혜만 누릴 순 없다.

열왕기하 23:31-24:7

여호아하스. 요시야가 애굽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계승하나 여호아하스는 요아스의 길을 가지 않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사관은 이것을 그의 조상들이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적는다. 사관이 남 유다 최악의 왕으로 꼽는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할 때도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라는 수식은 붙지 않았다.

잠시 건너뛰어 여호아하스를 이은 여호야김을 평가할 때도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라고 적었다.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와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는 유다가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호아하스는 애굽 바로 느고에 대적한 요아스를 이은 왕이라 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만다. 대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아하스 보다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두살 위다)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고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개명시켰다. 엘리아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언약에 따라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요시야는 아들에게 엘라아김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셨다)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바로 느고는 여호야김 (여호와가 세우셨다)라고 불렀다. 아마도 느고가 창조주 하나님을 유다 민족 신으로 격하시키고자 했을 수도 있고, 이방 느고를 통해 주님이 하신 일임을 교훈하고자 했을 수도 있겠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에서 죽고 만다.

여호야김은 느고에게 은과 금을 바쳤다. 느고에게 은과 금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애굽에 의해 세워진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공격에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섬겼다. 그러나 세해가 지나자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 반기를 들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애굽에 대한 충성일까 아니면 은과 금을 바친 애굽에 마음을 둔 결과일까? (그게 그거) 하여간 여호야김은 화를 자초했다. 앞에서 말한대로 유다 조상들의 모든 행위, 유다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주님은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고자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사관은 애써 이 모든 일을 자초 한 것을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므낫세가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을 주님께서 결코 용서하실 수 없어서라고 므낫세를 희생양을 만들었지만 말이다.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쳐 의지한 애굽은 다시는 국경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사관은 적는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속에서 흐름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유다는 이렇게 저물어 간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유다는 이렇게 망해 간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을 때 의지해야 할 것은 주님이시다. 눈을 들어 산들을 보아도 우리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밖에 없다.

열왕기하 23:21-30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실천하는 요시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기로 한다. 사관은 무려 사사시대부터 유다 여러 왕들조차 이렇게 지킨 일이 없던 유월절이었다라고 평가한다. 역대기에 보면 히스기야 때도 유월절을 지킨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월절을 지킨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철저하게 지킨 것은 몇 안되는 것 같다. (유월절이란 단어로 구약을 검색하면 정말로 여호수아서 이후에는 열왕기하 역대하 두곳 요시야와 히스기야 왕 때와 에스라서 두번 에스겔서에 한번 나온다.)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순종은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래서 사관은 다시 한번 요시야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평가한다. 이보다 완벽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요시야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별개였다. 유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사관은 굳이 므낫세가 주님을 격노하게 한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므낫세의 죄 때문에 요시야가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다가 심판 받을 만큼 죄를 채우고 채웠다는 의미다. 주님은 유다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과 성전도 버리겠다고 하신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요시야는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갑자기 18:5의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는 평가와 비교하게 된다.

요시야 왕은 어쩌면 율법을 자신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열심은 자칫 자기 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많다. 그래서 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말씀을 순종했다는 요시야의 평가보다 주님을 의지했다는 히스기야의 평가를 받고 싶다.

어차피 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내 마음, 내 뜻, 내 힘을 내려 놓고 (그럼 뭐가 남나) 주님을 의지한다.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열왕기하 23:1-20

요시야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이 모여 성전으로 올라갈 때 유다 모든 사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했다.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었다. 얼마나 걸렸을까? 모세오경

언약책을 읽은 요시야 왕은 주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겠다고 언약을 세웠다. 백성들도 그 언약에 동참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는 첫번째 실천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 성전 밖도 아니고 성전 안에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제사하던 제기들이 있었다니. 성전안의 우상들을 기드론 밭에서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제거한 후 우상들과 일원성신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없앴다. 아니 아세라 상이 또있네. 이 아세라 상도 기드론 시내로 가져가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하나. 성전 안에 있는 남창의 집을 헐었다. 한마디로 성전은 구석구석 더럽혀져 있었다.

그리고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있던 산당들을 헐어버렸다. 산당들의 제사장들에게 더이상 제사장 직분을 맡지 못하게 하였다. 자녀 인신 제사를 드리는 법을 금지시켰다. 태양신을 섬기는 것도 금지시켰다. 아하스와 므낫세가 세웠던 제단들도 헐어 버렸다. 선대 왕들이 세웠던 산당들도 제거했다. 목석의 우상들을 찍어버렸다.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다…끝이 없다.

정말 끝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 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고후 10:5 말씀이 떠오른다.

“세상은 원칙이 없습니다. 인정사정 없는 냉혹한 곳입니다! 세상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일에 사용하는 도구는 마케팅이나 시세를 조작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구는 타락한 문화 전체를 뒤엎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뒤틀린 철학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기 위해 세워진 장벽들을 허물고 모든 흐트러진 생각과 감정과 충동을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삶의 구조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도구는 모든 방해의 원인을 제거하고 성숙에 이르는 순종의 삶을 세우는 데 즉시 쓸 수 있도록 준비된 도구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6절 메시지 번역)

모든 교만, 모든 생각,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안에서부터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