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4:17-29

승장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먼저 죽고 남유다 왕 아마샤는 15년을 더 생존했다. ‘통치했다’라는 단어 대신 ‘생존했다’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은 의미 있을까? 아마샤가 반역의 무리에 의해 쫓겨났고 결국 도망지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생존’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샤도 다윗성에 장사되고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다윗의 위를 잇는다. 반역의 무리들도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언약을 존중? 하는 듯 하다.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는 아마샤가 잃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십일년간 다스렸다. 무려 사십일년이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삼십년 이상 통치한 왕이 없었다. 증조부 예후가 28년 통치한게 최장이었는데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 사관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게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41년의 통치를 정리해버리고 만다. 대신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 이것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너무 심하여, 매인 사람이나 자유로운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이스라엘을 돕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없애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새번역)”라고 여로보암의 번영을 ‘주님’이라는, ‘주님께서는’ 이라는 주어로 대신 설명한다.

물론 여로보암이 다메섹도 회복하고 유다에게 속하였던 하맛을 회복하는 등 이스라엘 번영기를 이끌었지만, 사관은 여로보암의 통치 41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결과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드디어 여로보암이 죽고 예후의 사대손 스가랴가가 왕이 된다.

주님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요아스의 아들  (예후의 3대손) 여로보암의 통치기간 동안 북이스라엘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삶의 목표가 번성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기 위해 은혜와 긍휼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지만 행한 악에 대한 심판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이땅에서 번성하게 하려고 구원하시는 게 아니다. 앞서 묵상한 디모데후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가르침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것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금하며 자만하여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번영에 빠져서는, 취해서는 안된다. 여로보암에 대한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