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대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앗수르로 잡혀갔다. 앗수르 왕은 대신 사마리아 여러 성읍들에 여러 민족의 이방인들을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를 경외했을리 만무했다. 주님은 사자들을 그들에게 보내 몇명을 죽였다.
사관은 사마리아에 이주한 이방인들 몇이 사자에게 죽임당한 사건을 그들이 주님을 (몰라)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방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사마리아 땅을 다스리는 신의 법을 몰라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마리아 땅신(지신)의 제사장을 데려와 사마리아 지신의 법을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앗수르 왕의 허락을 받아 사마리아에서 잡혀갔던 제사장 한명을 귀환 시켜 벧엘에 거주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할지 가르쳤다.
(사마리아에 남았던 이스라엘 백성과) 귀환하여 벧엘에서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할지 가르친 제사장은 여호와 창조주를 사마리아의 지신(땅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이주해 온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었다. 32절이 하이라이트다.
[그들이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들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2)]
저들의 혼합된 종교적인 열심은 온전히 ‘자기를 위하여’ 행한 것이었다. 그러니 여호와를 경외함도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관은 34절에서 바로 잡는다.
[그들이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령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는도다. (34)]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35 절부터는 아주 혼란스러운 본문이다. 사관은 사마리아의 혼합된 잘못된 종교적 열심이 역사를 기록하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다고 적는다. 사마리아에 이주한 다른 민족 이방인들에게는 야곱의 자손에게 세우신 주님의 언약이 어떻게 받아드려졌을까? 사관은 단순히 사마리아의 남은 자들이 이방인들을 좇아 행한 것을 책망하는 것일까? 사마리아 땅에 이주해 온 이방 민족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신 여호와, 이스라엘 민족신을 받아들여야 했을까? 우리 입장에서는 맞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앗수르 땅으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교지에서도 영적전쟁은 항상 존재한다. (지신 수준의 싸움에서 기독교가 항상 이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출애굽 열재앙에서 보듯 아홉 재앙을 버텨낸다. 많은 경우 먼저 지치는 것이 선교사들이다.)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주님을 경외하면서도 “그들의 자자손손이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대로 그들도 오늘까지 행한다. (41b)”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도 그럴 것이고 서구의 기독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언약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서 이루신 언약을 잊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그 어떤 종교적 열심보다 중요하다. 주님을 땅의 신, 지신으로 삼아 자기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주님이라는 존재를 알거나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수준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고 언약을 준수하는 것이다.
음 생각이 얽히는 아침이다. 보혜사 성령님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