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8:1-16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3,4)]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 남유다에서는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다. 이전의 왕들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라는 반쪽 칭찬만 받았다. 그런데 히스기야에 와서 드디어 산당을 제거했다.

산당은 자신들만의 신들을 섬기는 장소, 혹은 사람이 만들어 세운 우상들이다. 히스기야는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고 그냥 구리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 대신 절하는 우상의 신상들, 물건들을 제거했다.

사관은 이런 히스기야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5)라고 평가한다.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연합했다. 주님과 마음이 합한자라는 평가를 받은 다윗과 같은 평가다.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않자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함께하시며 히스기야를 형통하게 하셨다. 앗수르에게 굴복하지 않는 용기도 주셨다. 블레셋 땅을 쳐서 영토도 확장했다. 그리고 유다 성읍들을 요새화 했다.(13)

히스기야 왕, 4 년에 앗수르는 사마리아를 포위했고 삼년안에 함락시켰다. 히스기야 제 6년, 호세아 왕 제 9년에 북이스라엘은 멸망했다. 사관은 다시한번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저기들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의 언약을 깨뜨렸으며, 주님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순종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한줄로 정리한다.

사마리아의 포위부터 함락을 지켜본 히스기야 왕은 유다를 요새화 했다.(13) 히스기야 왕은 ‘전 유다 성읍의 요새화’만이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을까? 그러나 십년 가까이 공들인 유다 성읍들의 요새화는 히스기야 제 14년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히스기야는 급기야 산헤립에게 화친을 요구하고 앗수르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용서를 구했다. 앗수르 왕은 은 삼백,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했고 히스기야 왕은 성전 창고의 은금으로 모자라 성전 기둥의 금칠을 벗겨서 주어야 하는 수치를 당했다.

주님과 연합했다고 위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다고 형통만 기다리지는 않는다. 히스기야는 주변국가와의 싸움에서 국방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유다 온 성읍을 요새화 했다. 그런데 채 준비가 끝나지 않았는데 앗수르의 침공을 당했고 요새화의 수고는 헛수고가 되었다.

주님의 뜻과 나의 준비, 나의 열심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히스기야 이야기가 결론나지 않아서 나의 적용도 결론내기 힘들다. 다만 ‘의지할 분이 주님이시다’라는 명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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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의지 할 것인가? 열왕기 사관은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포위되고 급기야 함락되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전 유대 성읍들의 요새화’ 정책을 추진했다. 여호와께 연합하여 주님을 떠나지 않았던 히스기야, 주님은 이런 히스기야와 함께 하시며 히스기야를 형통하게 하시고 앗수르에게 굴복하지 않을 용기도 주셨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함락당하자 히스기야는 ‘유다 성읍들의 요새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십년 가까운 요새화는 (자기 의지는) 앗수르 산헤립의 침공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히스기야는 급기야 산헤립에게 화친을 요구하고 앗수르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용서를 구했다. 앗수르 왕은 은 삼백,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했고 히스기야 왕은 성전 창고의 은금으로 모자라 성전 기둥의 금칠을 벗겨서 주어야 하는 수치를 당했다.

히스기야의 요새화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물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열심이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가? 주님이 주시는 형통이 지속되면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분간하기 쉽지 않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형통할 때 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왕하 1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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