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 때에’ 라고 시작한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던 때, 아니면 기도로 나은 후 였을까. 그 때에 바벨론 왕이 편지와 예물로 히스기야를 문병했다.
사신들을 보내 히스기야를 병문안 한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어떤 명성?을 들었을까? 사신들은 히스기야를 무슨 말로 칭송했을까? 사관은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가 어디를 가든지 형통했다고 기록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가 만국에 퍼졌었듯이 히스기야의 형통도 만국에 퍼졌을까? 당시 강국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지 않은 히스기야의 용맹을 염탐하고자 했을까? 하여간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의 감언이설에 자고했던 것 같다. 사신들에게 나라를 속속들이 보여 주었다.
이사야가 (황급히) 다시 등장한다. (주님께 무슨 말을 듣고 왔었길래 )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사신들과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캐 물었다. 히스기야는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먼지방’이라는 수식어는 마치 군사적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사야는 왕에게 무엇을 사신들에게 보여주었는지 물었다. 히스기야는 (자신있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고 대답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주님의 때가 이르면 바벨론에게 왕궁의 기물을 빼앗기고 후손들도 잡혀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히스기야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화답한다. 그동안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는 샬롬이요 진리였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통치하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대로 샬롬과 진실을 누리는 것에 자고했기 때문일까. 후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주님의 신탁을 들어야했다.
히스기야는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왕이다. 히스기야는 떼를 써서 기도로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은 왕이 아니다. 그러니 후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주님의 뜻은 대신 선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히스기야는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저수지를파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도 나름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신탁을 실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므낫세가 왕이 되었다.
우리 삶의 큰 적은 ‘먼 지방’에 있지 않다. 시간적으로도 언제 일어날 지 모른다. 샬롬과 진리로 충만할 때 다가 올 수도 있다. 바로 자고할 때다, 바로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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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후손들이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히스기야의 잘못에 의한 결과라고만 생각하면 안됨. 주님은 아비의 죄로 자식이 자식의 죄로 아비가 벌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열왕기 사관은 이미 14장에서 아마샤 왕이 율법을 따라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왕이라고 소개했음을 기억한다면 더 분명한 결과. 사관은 교만은 멸망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샬롬(평안)과 진실을 누리는 것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 역사의 교훈을 받으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봄. 결국 포로는 불순종한 후손들의 책임임.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자고할 수 있음.
히스기야는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왕이었음. 병이 나은 것도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꾼것이 아님. 자기 때만 샬롬하고 진실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후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무시한 왕이 아니라, 이 문제는 금식하고 메달려야 할 문제가 아니라 후손들이 주님께 의지해서 포로로 잡혀가는 때가 (자신의 생이 15년 늘어난 것 처럼) 아주 아주 오랜 후로, 영원히 오랜 후로 늘어날 수 있다는 바람, 혹은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됨.
따라서 히스기야의 반응은 자포자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결과요, 후손들도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사관은 18:5에서 이미 히스기야에 대한 한줄 평가를 내렸음.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성경은 간음에 살인을 한 다윗도 주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한줄 평가를 내리기도 함. 결국 우리의 믿음을 해치는 것은 멀리 있는 (먼 지방 바벨론) 것이 아님.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내 속에 있는 자고함이 아닐까?
히스기야가 한순간 무너졌지만 (아마도 여러번) 그는 평생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살았던 왕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사관의 평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