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

므낫세. 통치기간 55 년. 최장수 통치. 그래도 선왕 히스기야보다도 적은 지면을 차지한다. 사관의 평가는 직설적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행하여 주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여호와 보시기에 가증한 일 첫번째가 선왕 히스기야 때 와서야 겨우 제거한 산당을 다시 세운 것이다. 겨우 한 세대만이다. 히스기야와 므낫세의 공동 통치기간을 고려한다면 히스기야는 결국 죽기 전에 ‘너는 집을 정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셈이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인지상정을 극복해야 한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므낫세는 자식을 제물로 드렸다. 믿음만이 아니라 탐욕도 인지상정을 거스리게 한다.)

므낫세의 악행을 적고 또 적고. 사관은 므낫세가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렸다고 마무리 한다.

이어지는 아들 아몬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결국 아몬은 신하들의 반역에 죽고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다.

열왕기하 20:12-21

또 ‘그 때에’ 라고 시작한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던 때, 아니면 기도로 나은 후 였을까. 그 때에 바벨론 왕이 편지와 예물로 히스기야를 문병했다.

사신들을 보내 히스기야를 병문안 한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어떤 명성?을 들었을까? 사신들은 히스기야를 무슨 말로 칭송했을까? 사관은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가 어디를 가든지 형통했다고 기록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가 만국에 퍼졌었듯이 히스기야의 형통도 만국에 퍼졌을까? 당시 강국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지 않은 히스기야의 용맹을 염탐하고자 했을까? 하여간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의 감언이설에 자고했던 것 같다. 사신들에게 나라를 속속들이 보여 주었다.

이사야가 (황급히) 다시 등장한다. (주님께 무슨 말을 듣고 왔었길래 )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사신들과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캐 물었다. 히스기야는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먼지방’이라는 수식어는 마치 군사적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사야는 왕에게 무엇을 사신들에게 보여주었는지 물었다. 히스기야는 (자신있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고 대답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주님의 때가 이르면 바벨론에게 왕궁의 기물을 빼앗기고 후손들도 잡혀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히스기야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화답한다. 그동안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는 샬롬이요 진리였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통치하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대로 샬롬과 진실을 누리는 것에 자고했기 때문일까. 후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주님의 신탁을 들어야했다.

히스기야는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왕이다. 히스기야는 떼를 써서 기도로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은 왕이 아니다. 그러니 후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주님의 뜻은 대신 선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히스기야는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저수지를파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도 나름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신탁을 실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므낫세가 왕이 되었다.

우리 삶의 큰 적은 ‘먼 지방’에 있지 않다. 시간적으로도 언제 일어날 지 모른다. 샬롬과 진리로 충만할 때 다가 올 수도 있다. 바로 자고할 때다, 바로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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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왕이다. 히스기야는 떼를 써서 기도로 죽을 병이 나는 왕이 아니다. 그러니 후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주님을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후손들이 주님을 의지함으로 샬롬과 진실의 기간이 영원히 길게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대신 주님의 뜻이 선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히스기야는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저수지를파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도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신탁을 나름 실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보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열왕기 사관의 히스기야 왕 한줄 평가가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18:5 새번역)]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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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후손들이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히스기야의 잘못에 의한 결과라고만 생각하면 안됨. 주님은 아비의 죄로 자식이 자식의 죄로 아비가 벌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열왕기 사관은 이미 14장에서 아마샤 왕이 율법을 따라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왕이라고 소개했음을 기억한다면 더 분명한 결과. 사관은 교만은 멸망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샬롬(평안)과 진실을 누리는 것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 역사의 교훈을 받으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봄. 결국 포로는 불순종한 후손들의 책임임.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자고할 수 있음.

히스기야는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왕이었음. 병이 나은 것도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꾼것이 아님. 자기 때만 샬롬하고 진실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후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무시한 왕이 아니라, 이 문제는 금식하고 메달려야 할 문제가 아니라 후손들이 주님께 의지해서 포로로 잡혀가는 때가 (자신의 생이 15년 늘어난 것 처럼) 아주 아주 오랜 후로, 영원히 오랜 후로 늘어날 수 있다는 바람, 혹은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됨.

따라서 히스기야의 반응은 자포자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결과요, 후손들도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사관은 18:5에서 이미 히스기야에 대한 한줄 평가를 내렸음.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성경은 간음에 살인을 한 다윗도 주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한줄 평가를 내리기도 함. 결국 우리의 믿음을 해치는 것은 멀리 있는 (먼 지방 바벨론) 것이 아님.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내 속에 있는 자고함이 아닐까?

히스기야가 한순간 무너졌지만 (아마도 여러번) 그는 평생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살았던 왕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사관의 평가처럼.

 

열왕기하 20:1-11

승전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 그 때에 히스기야는 병들었다. 그것도 중병에 걸렸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셨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왕으로서 인수인계를 하여라.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주님께 기도했다. 다른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의지다. 심지어 선지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산헤립의 편지를 펼쳐놓고 주님께 기도했던 히스기야는 자신의 마음을 찢고 (마음을 펼쳐놓고)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히스기야는 한참동안 흐느껴 울었다. (3 새번역)]

생명의 위로가 아닌 죽음의 선언을 전했던 이사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도 기도했으리라. 그리고)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하셨다.

[네 조상 다윗을 돌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사흘 뒤에는 네가 주의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여서,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내가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주님께서 히스기야를 고치시고 사흘 뒤에는 성전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다는 증거를 요청했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해 그림자를 십도 앞 혹은 십도 뒤로 움직이게 할 수 있으니 히스기야에게 선택하라고 말했다.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나는 증거를 요청했다. 이사야가 주님께 기도하자 아하스가 만든 해시계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났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주님은 히스기야의 살려달라는 애걸에 주님의 뜻을 바꾸셨을까? 아니 우선 히스기야는 살려달라고 애걸했을까? 히스기야의 기도문을 읽고 또 읽어도 살려달라는 애걸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진실함과 온전한 순종과 선한 일 햄함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히스기야는 어쩌면 십자가 상의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심정이었을 수 있다. 앗수르 산헤립의 손에서 유다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선한 구원의 손길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울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음이지 않았을까? 당시 히스기야에게는 왕위를 계승시켜줄 아들이 없었을 수 있다. 아니면 어렸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이 주님을 순종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너는 집안을 정리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이룰 수 없으니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십오년을 더 살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는 집안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기한을 주신 것이다. 주님이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주신 대답을 보면 확실하다. 주님은 자신을 다윗을 돌 본 주님이라고 소개하고, 다윗을 보아서라는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고 하셨다. 다시말하면 영원한 다윗의 위를 약속하신 주님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기한을 알려 주신 것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주님은 히스기야가 기력을 회복하여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는 왕위 계승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주신 것이다.

나도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라”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심판대에 섰을 때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보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많이 부족해서, 엉엉 울게 되겠지만. 오늘 하루도  주님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라고,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하라고 하신다.

 

열왕기하 19:20-37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산헤립이 보내 온 항복하라는 편지 때문에 히스기야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답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기도 응답이다. 이번 기도 응답은 기도하는 당사자에게 직접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을 찢고 주님 앞에 선 히스기야가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없애버리셨다.

주님의 대답은 앗수르 왕에 관한 것으로 시작한다. (앗수르 왕에게 직접 이 대답을 들려줄 수 있었다면, 그는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 왕처럼 돌이켰을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산헤립은 불쌍하다고 할 수 밖에.)  주님은 앗수르 왕이 항복하라고 협박을 하지만 오히려 예루살렘의 멸시를 받는 존재가 된다고 하신다. 산헤립이 고개를 숙이고 대신 유다 백성들이 머리를 들 것이다. 산헤립이 주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순간, 주님을 향하여 교만한 순간 천지의 창조주 앞에 잠잠해야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하신다. 산헤립의 정복에 대한 자기 자랑은 다 주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결국 산헤립은 화살 한방 쏘지도 못하고, 공격한번 하지 못하고 후퇴할 것이라고 하신다. 대신 예루살렘은, 유다는 다시 평온을 찾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시고 유다를 구원하셨다고 선언하신다.

이사야가 받은 말씀이 어떻게 히스기야에게 전달되었는지에 대해 사관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그날 밤, 주님은 친히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치셨다. 산헤립은 빈손으로 니느웨로 돌아갔다. 교만이 하늘을 쳤던 산헤립은 자신의 하나님(신) 니스록에게 제사할 때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목석의 우상이 어찌 산헤립을 지켜줄 수 있으랴) 그리고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이 앗수르 왕이 되었다.

세상을 호령했던 산헤립의 기개는 고개를 숙여야 했고 멸망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예루살렘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고개를 드는 것이 끝이 아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이 유다는 시냇가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열매을 맺을 것이다. 주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신다고 하신다. 누구를 의지 하는가?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주님의 열심’을 이루신다.

#주님의 열심 #시편1

 

열왕기하 19:1-19

랍사게의 도발에 백성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히스기야 왕이 적장의 말에 침묵하라고 명령했었기 때문이다. (함락당하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왕명에 일사불란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뭔가 영적인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엘리야김, 셉나, 요아가 히스기야에게 돌아와서 랍사게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울분을 참지 못하며 옷을 찢으며 돌아온 엘리야김, 셉나, 요아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도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갔다.  히스기야에게 자기 자신이 권력의 최정점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마지막으로 기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그러나 여호와의 전에서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지하는 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엘리야김과 셉나와 장로급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를 둘러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주님께서 랍사게의 망언을 들으셨으니 주님께서 랍사게를 꾸짖어 달라고, 그리고 남유다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전했다. 랍사게에게 들을 말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랍사게가 거짓 영에 사로잡혀 뜬소문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겠으며, 거기서 칼에 맞아 죽게 할 것이다.

랍사게는 이사야의 신탁대로 회군해서 립나와 싸우는 앗수르 왕을 만났다. 앗수르 왕은 구스 왕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앗수르 왕이 전한 내용은 랍사게의 조롱과 다르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받고 또 다시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갔다. 이번에는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이사야에게 신하들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주님앞에 섰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했다.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신 여호와께 기도했다. 이사야에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랍사게의 죄를 하나님께 고해달라고 부탁했듯이, 앗수르 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을 들어달라고 기도했다. 히스기야의 신관은 분명했다. 앗수르 왕이 불태운 신들이라는 것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목상과 석상뿐이었다고. (목상과 석상의 우상들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조) 그러니 우리 주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우리를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해 달라고. 그래서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살아계신) 하나님 (신)이신줄 알리시라고.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히스기야는 마음을 찢고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주님께로 돌아왔다. 네가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느냐? 사관의 히스기야 왕에 대한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18: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