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5:23-38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북이스라엘은 므나헴이 아들 브가히야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베가 호세아로 이어지는 반정의 거듭으로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만다.

앗수르의 공경에 므나헴은 백성들을 쥐어짜 모은 일천달란트로 조공국으로 명맥을 유지 했으나 아들 브가히야 때에 이르러서는 결국 베가가 반역을 일으켜 브가히야를 죽이고 대신 왕이 되었다. 그러나 베가 역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앗수르는 이스라엘 온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이주시켰다. 허울뿐인 베가역시 호세아의 반역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남유다에서는 웃시야 (아사랴)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다. 사관은 왜 갑자기 남유다 왕 아사랴 (23,27절)를 웃시야 (30절 이하)로 이름을 바꿔 기록했을까? 아사랴 (여호와가 도우심)가  교만해지자 주님은 나병으로 아사랴를 치셨다. 나병으로 겸손해져서 웃시야 (여호와는 나의 힘)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나? 음

요담은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남유다의 왕들도 하나같이 완전하지는 않다. 사관은 반복적으로 ‘정직히 행하였으나’라고 ‘으나’라는 토를 단다. 요담의 경우 성전 윗문을 건축하는 등 나름 ‘성전 중심’의 왕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성전 중심’으로 이끌지 못했다. 주님은 비로소 백성들을 ‘산당 중심’으로 방치한 남유다에 아람 왕들을 보내어 치게 하셨다. 완전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같은 잘못이 반복되면 주님은 자신의 백성이라도 언젠가는 치신다. 한국교회가 처하 상황이다.

 

열왕기하 15:1-22

북이스라엘에서 무려 42년을 다스린 여로보암 왕 시대에 남유다에서는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어 52년간 다스리게 된다. 아사랴에 대한 평가역시 선왕 아마샤와 다르지 않다. 아사랴가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따랐으니 당연한 결과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 판박이 평가다. 사관은 주님이 아사랴를 치셔서, 아사랴는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헤서 왕자 요담을 통해 통치했다고 마무리 한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주님이 나병으로 아사랴을 치셨다는 것은 아사랴의 교만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세의 누이 미리엄도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하다가 나병이 걸렸었다. 나병이 아사랴를 겸손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병으로 말미암은 겸손이 52년이라는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음~~

아사랴 제 38년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의 42년의 통치가 마감되고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어쩌나 예후의 4대손이다. 스가랴 역시 부친 여로보암 2세와 동일한 평가를 받는다. “…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그러나 부친 여로보암과 달리 6개월만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의 반역에 죽임을 당한다.  사관이 살룸의 통치기간을 아예 기록하지 않을 정도로 살룸은 바로 므나헴의 반역에 죽었을 것이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망할 때까지 브가히야에게 왕위를 물려준 므나헴을 제외하곤 암살과 쿠데타의 연속이다.) 므나헴의 평가에서 보듯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은 결과다. 사관은 /평/생/ 이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므나헴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이스라엘을 유지한다.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29:2).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돈의 도움으로 평화를 살 수 없다.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 왕들의 이름을 외우기도 쉽지 않다. 족보는 더군다나 어렵다. 이름도 섞여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든 모든 왕들은 주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이 다스리신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해도 42년동안 다스릴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후대는 반년만에 망할 것이고 그 나라는 /평생/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다스림은 우리로 순종의 자리에 나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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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에 그 아들

남유다 아마샤와 아사랴. 둘 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아마샤는 에돔에 대한 승전으로 교만하여 북이스라엘에 덤비다가 패전하고 재위29년만에 신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아들 아사랴도 여호와께서 나병으로 치신 것으로 보아 교만했으리라. 그러나 나병으로 겸손해졌을까? 무려 52년동안 남유다의 전성기를 이어간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 스가랴. 둘 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여로보암은 42년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아들 스가랴는 (예후의 4대손이다) 반년만에 반역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반정에 반정을 거듭하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쇠락한다.

그아버지에 그아들이다. 그러나 삶의 굴곡은 아버지와 아들이 많이 다르다. 삶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자녀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나의 성공이나 실패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주님이시다’라는 명제다.

 

열왕기하 14:17-29

승장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먼저 죽고 남유다 왕 아마샤는 15년을 더 생존했다. ‘통치했다’라는 단어 대신 ‘생존했다’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은 의미 있을까? 아마샤가 반역의 무리에 의해 쫓겨났고 결국 도망지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생존’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샤도 다윗성에 장사되고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다윗의 위를 잇는다. 반역의 무리들도 다윗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언약을 존중? 하는 듯 하다.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는 아마샤가 잃은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십일년간 다스렸다. 무려 사십일년이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삼십년 이상 통치한 왕이 없었다. 증조부 예후가 28년 통치한게 최장이었는데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그런데 열왕기 사관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게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41년의 통치를 정리해버리고 만다. 대신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 이것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이 너무 심하여, 매인 사람이나 자유로운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이스라엘을 돕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셨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없애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이다.(새번역)”라고 여로보암의 번영을 ‘주님’이라는, ‘주님께서는’ 이라는 주어로 대신 설명한다.

물론 여로보암이 다메섹도 회복하고 유다에게 속하였던 하맛을 회복하는 등 이스라엘 번영기를 이끌었지만, 사관은 여로보암의 통치 41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결과라고 정리한다. 그리고 드디어 여로보암이 죽고 예후의 사대손 스가랴가가 왕이 된다.

주님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요아스의 아들  (예후의 3대손) 여로보암의 통치기간 동안 북이스라엘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삶의 목표가 번성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기 위해 은혜와 긍휼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셨지만 행한 악에 대한 심판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이땅에서 번성하게 하려고 구원하시는 게 아니다. 앞서 묵상한 디모데후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가르침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것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금하며 자만하여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번영에 빠져서는, 취해서는 안된다. 여로보암에 대한 평가에 주목해야 한다.

열왕기하 14:1-16

아마샤의 제위기간은 거의 삼십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으로 평가 받는다. 다만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사관은 아마샤가 율법을 준수해 선왕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벌하면서 연좌제를 적용 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에돔을 물리친 승전도 추가한다.

그런데 남유다 왕 아마샤의 이야기가 북이스라엘 요아스 이야기로 잠시 주인공이 바뀐다. 아마샤가 북이스라엘 요아스에게 도전을 했다가 패하고 말았다. 형제국에서 속국이 되어버렸다. 사관은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입을 빌려 아마샤가 에돔에 대한 승전으로 마음이 교만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교만은 주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 중의 제일이다.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어도 교만하면 무너진다. 율법에 근거해 당시 당연시 하던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으면서도 승전에 취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망각한 아마샤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다.

주일 아침. 겸손히 주님께 나가게 하소서.

열왕기하 13:14-25

엘리사의 죽음. 하늘로 끌려 올라간 엘리야와 달리 엘리사는 죽어 묻혔다. 죽은 엘리사가 장사되어 뼈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생명이 없음에도) 엘리사 뼈에 닿은 장사된 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사관은 기록한다. 왜?

엘리사가 죽기전 요아스 왕이 방문해서 계시를 받은 이야기 사이에 장사되어 뼈밖에 안남은 엘리사에게 마져도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여호아하스로부터 마병 오십명, 병거 열대, 보명 만명만 물려받은 요아스 왕에게, 엘리사에게 받은 계시, 즉 아람을 세번 치리라는 계시를 보증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사관은 남유다는 다윗과의 언약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북이스라엘도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유지된다고 기록한다. 다시말해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 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은혜의 언약을 이뤄가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분이시다. 놀라운 간증을 하는 강사들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