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3:1-13

북이스라엘에서는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여호아하스도 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 주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끊임없이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침략을 받게했다. 아람의 학대에 참다 못한 여호아하스는 결국 주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주 하나님은 여호아하스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스라엘은 아람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다시 따랐다. 아세라 목상을 묵인했다. 주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노하셨고 아람 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거의 멸절시켰다. 사사시대의 반복이다. ‘죄-심판-구원’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여호아하스는 아들이름을 요아스로 지었다. 남유다의 왕 요아스의 이름을 따른 것일까?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예후는 28년, 여호아하스는 17년, 요아스는 16년.   점점 재위 연수가 줄어든다. 이스라엘의 요아스 역시 선대를 따라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을 여로보암이라고 지었다. (아니지 만약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도 조선 왕들의 이름처럼 묘호라면, 혹은 사관이 붙여준 이름이라면) 예후왕조가 결국 여로보암의 길 가운데서 망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이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은 예후 왕조. 주 하나님 대신 ‘자기 주도의 금송아지’를 따르는 삶, 자기 열심으로 사는 삶의 전형이다. 거기에 어찌 안식이 있으랴.

 

 

열왕기하 12

북이스라엘에서 예후가 아합 집안을 멸절시킨지 칠년, 남유다에서도 아합의 딸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가 왕이 되었다. 무려 사십년간 통치했다.

사관은 요아스가 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라고 기록한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교훈하는 동안이라는 단서가 붙지만.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흘렀다. 요아스 나이 서른! ‘이립’이다. 자립할 때다. 더이상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에 따라 왕노릇 할 나이가 아니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던 요아스가 이제는 제사장들에게 (성전 수리를) 명령한다.

6절이 좀 애매하다. 요아스 제위 23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의 주도로 성전보수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3년차에 요아스가 주도적으로 보수작업을 명하였다고 본다.

어쩌면 성전보수는 국정의 0순위가 아니었을 수 있다. 제사장 여호디아의 교훈을 받던 시절에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성전보수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전보수는 요아스 왕에게 있어서는 ‘생가 보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아스에게 성전은 어릴 때 숨어 지내던 곳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아람 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오고자 했다. 요아스는 성전에 두었던, 선대 왕들과 자신이 구별하여 드렸던 성물을 다 가져다가 하사엘에게 주고 화평을 구했다. 마치 자기 집 물건 인양. (물론 전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는 어쩔 수 없는,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쟁은 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모르는 처사였다. 주 하나님께 물어야 했다.)

북이스라엘 예후가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자 하사엘의 침입을 받은 것처럼, 하사엘의 남유다 공격은 이립의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벗어난 결과일 수도 있다. 열왕기하 사관은 더이상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는다. 극적이었던 전반전과 달리 사관은 요아스의 후반전은 대충 마무리 한다.

요아스는 결국 신복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다윗의 위를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를 통해 이어가신다.

그냥 삐딱하게 읽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시 했던 요아스의 성전보수가 생가복원 차원으로 읽혀진 아침이다. 좋다고 좋은게 아니다. 좋지 않아 보여도 바른 것이 있다. 좋은 것이 아니라 바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 바른 길을 걷게 하소서.

열왕기하 11

아합의 흔적은 남유다에도 남아 있었다. 아합의 딸 아달랴.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북이스라엘 문안길에 예후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아들 아하시야도 예후에게 잃은  아달랴는 왕손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남유다를 다스렸다. 마치 아합 왕조를 남유다에서 이루려는 듯이.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어 성전에 숨어 육년동안 지내게 했다. 이 육년동안 아달랴가 남유다를 통치했다. 아합의 길을 걸었다.

일곱째 해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웠다. 사관은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언급해서 요아스가 다윗의 가문을 잇는 왕임을 확실히 한다. 그리고 요아스에게 왕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 이날이 안식일이었다. 제사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아달랴가 ‘요사스 왕 만세’소리에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를 외쳤지만 성전 밖으로 쫓겨나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백성과 요아스 왕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시켰다. 그리고 요아스와 백성들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였다.

백성들은 계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박과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약에 따라 바알산당을 허물고 바알 우상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였다. 바알 산당과 바알 우상과 바알 제사장은 아합 집안의 상징이었다.

아달랴 통치기간 남유다는 이름만 다윗 왕조였지 아합왕조였다. 어제 명성교회세습에 관한 결정은 이름만 총회재판국 결정이었지 세상법정의 유전무죄와 다를게 없었다. 판결을 하면서 “8:7로 김하나 목사님의…” 라고 직함에 ‘님’자를 붙이는 재판국장이 제정신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님의 자녀를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려는 아달랴의 계략과 다름이 없다. 이름만 교회지 바알신앙이 아닌가? 한국교회는 이제 일곱째 해를 기다려야 할 처지다. 누가 여호세바가 될 것이며, 누가 여호야다가 될 것인가? 누가 가리 사람들이 될 것인가?

‘가리 사람’? 공동번역은 ‘외인부대’라고 번역한다. 음. 할례받지 못한 , 이방인들 가운데 주님의 언약백성이 된 사람들. 니드님 사람들과도 연관있을까? 어쩌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바르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열왕기하 10:18-36

하나님에 대한 ‘예후의 열심’은 극에 달했다. 바알을 섬기는 사람을 색출해서 죽이기 위해 계책을 꾸몄다. 사관은 이 일에 대해서도 주 하나님께서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한다. 칭찬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통 삼사대를 운운하는 것은 저주다. 칭찬은 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예후에 대한 주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에 가깝다. 하나님의 열심이 아닌 ‘예후의 열심’에 대한 결과다. 어쩌면 예후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또다른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주 하나니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신탁을 이용했다고 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사관은 이런 예후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분명이 밝힌다. 예후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칭찬이 아닌 벌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침략당한다.  스물여덟해의 예후의 열심은 이렇게 저물었다.

예후는 외적, 눈에 보이는 우상 바알을 제거 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제거 했다. 그러나 내적 우상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자기 열심’이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무서운 우상이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뭘 하겠다는 열심도 악인의 꾀요, 죄인의 길이요, 오만한 자의 자리다. 이것은 자신만의 하나님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다. 사대만에 무너질 탑을 쌓는 것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는 것이다.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굴복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열왕기하 10:1-17

예후는 철저히 자기주도로 하나님의 신탁을 이용했다. 신탁에 없는 남유다 아하시야 왕도 죽였다. 개들이 이사벨을 먹고 이사벨을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신탁을 들었음에도 이사벨을 장사하려고 했다. 물론 주님은 신탁을 이루신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멸절하는 것도 예후는 자기 주도로 진행한다. 그는 왕이 되리라라는 신탁을 받았으면서도 백성의 인정을 받으려고 협박하고 회유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아합의 아들 칠십명을 죽였다.

예후는 요람 왕가에 문안을 오던 남유다 왕 아하시야 형제 일행 42명도 죽였다. 아하시야 왕을 죽인 것과 함께 이것도 신탁에 없는 내용이다. 예후는 신탁을 이용해 철저하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 갔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예후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열심’으로 신탁을 이행했다. 사관은 아합가문의 심판에 대해서는 예후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을 이루었다고 정리한다. 그러나 예후가 왕이 되리라는 신탁을 위해서는 자기 주도로 일관했다. 예후에 대한 나만의 편견일까?

‘나의 열심을 보라’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하나님의 열심에 굴복하고 순종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