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9:27-37

샬롬은 만인의 관심사다. 문제는 아무도 샬롬을 나누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화, 평안은 나눠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대적을 물리쳐야 샬롬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예후도 다르지 않았다.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죽인 예후는 이세벨까지 죽인다. 이세벨은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라고 묻다가 죽었다. 한마디로 살육으로 평안(샬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한 것이리라.

하나님의 신탁(계시)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예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 편에서 신탁을 실천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 편에서 신탁을 이용했다.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예후는 자기 편이 될 자를 찾았다.

편을 가르고서야 어찌 평안할 수 있을까? 샬롬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설 때만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칭하면서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들. 내편 네편에는 샬롬이 없다. 샬롬은 하나님께 굴복해서 모두 하나님 편에 서야 누릴 수 있다.

열왕기하 9:14-26

샬롬!

요람 왕은 평화를 구하나 이미 늦었다. 한 무리가 진격해 온다. 신하를 보내 평안을 묻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세번째는 자신이 아픈 몸을 이끌고 화평을 구하러 나갔지만 아합의 집을 멸절시키고 왕이되라는 주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후에게는 샬롬이 없었다.

샬롬은 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싸워 이겨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굴복해서 얻는 것이다.

열왕기하 9:1-13

엘리사는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예후에게 기름부으라고 명한다.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신다. 예후는 여호사밧의 아들로 소개된다. 남유다 왕들이 아합가문의 왕들의 이름을 따, 아합의 사위나라가 되었다면 예후는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름이 같은 아버지를 둔 것이다. 이름의 뜻도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심판’이며, 예후는 ‘그는 여호와’이다. 결국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심판을 통해 주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이리라.

오늘의 삼세번은 ‘기름을 붓다’이다. 엘리사가 제자에게 명령할 때, 엘리사의 제가자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 예후가 무리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할 때 ‘기름을 붓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이 일의 주권이 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관은 이스라엘의 주관자가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아닌 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예후를 통한 아합집안에 대한 주 하나님의 심판은 구체적이고 철저하시다. 멸절하기까지 심판하신다.

젊은 선지자의 행동은 예후와 함께한 무리에게 보기에는 미친짓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선지자가 군대장관 앞에 나타나서 독대를 요청하고 이래라 저래라 신탁을 전하고기름을 붓고 도망쳤으니 미친 자라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쳤다는 것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 강하다.  무리들은 젊은 선지자가 예후에게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신탁을 하고 갔음을 알았을 것이다. 예후는 그것을 무리에게 밝혔다. 무리는 신탁의 내용대로 예후를 왕으로 삼았다. 신탁의 내용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자신들을 위해서 새로운 권력에 붙은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 세상은 미친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다. 급히 도망쳐야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할 말은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8:16-29

우리가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의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오랜만에 열왕기에 남쪽 유다의 왕이 기록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왕으로 세워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고 사관을 기록한다(16). 사관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3:1)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구분하기 위해 아합의 아들을 요람이라고 기록한다. (새번역에서는 3:1에서도 요람이라고 번역)

사관은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이름을 ‘여호람/요람’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유다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아합의 딸을 아내로 삼고 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래도 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유다를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악에는 벌이 따른다.

에돔이 유다를 배반했다. 배반하고 덤비는 에돔에 대항했으나 더 이상 정복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포위 당했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때 립나도 배반했다. 이렇게 아합을 따른 여호람의 시대는 저물고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역시 이스라엘 여호람/요람 왕의 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이름을 따온 것 같다. 하기야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으니 아달랴가  일찍 죽은 자기 오빠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사관은 아하시야가 아합의 길로 행하여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아하시야는 아합 집의 사위가 되었다’라고 강조한다. 이스라엘 왕 (외삼촌) 요람을 도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웠고, 요람이 부상을 입자 요람 문병까지 갈 정도로 한통속이 되었다.

유다왕 여호람과 아하시야. 이름뿐만 아니라 통치스타일이 아합 집안의 길을 따랐다.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맞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잠재력을 상상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일된 한국교회도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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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서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여호람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까? 아들 이름마져 북이스라엘 요람왕을 따랐다. 아합의 딸과 결혼까지 시켰다. 여호람도 아들을 아내 아달랴 (아합의 딸)의 오빠이름을 따서 아하시야로 불렀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사관은 아합의 사위국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국력적, 경제적 잠재력을 상상하면 나도 즐겁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들도 ‘바벨론의 사위’라고 불릴지 모른다. 음. 지나친 적용일까?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새벽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