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4-27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무리에게 돌아오셨을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덧붙이기를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 아이를 데려오게 하시고 축귀하심으로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시건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마태는 10장을 시작했었다. 제자들에게 축귀의 권능이 주어졌었다. 그런데 남아 있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조용히 예수님께 자신들의 실패이유를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라고 앞에서도 묵상했다. 믿음이 없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칠십인 추수꾼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남아 있던 제자들이 주의 이름에 의지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능을 의지 했다고 할 수 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답을 포함시킨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발휘된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은 다시한번 죽으심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나 제자들에게는 죽음만 들리지 부활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근심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셨을 때 성전세를 걷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왜 예수님은 성전세 반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내실 것이라고 답하고 예수님께 가니, 예수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아들에게서 받느냐 타인에게서 받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타인에게서 받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그렇다 아들은 세금을 면제 받는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세리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물고기를 잡아 물고기 입에서 얻은 한 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를 내라고 하셨다.

진정한 임마누엘은 주님의 권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아버지와 사귀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신용카드를 사용한다면 거부된다. 신용카드에 문제 있어서가 아니라 카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름으로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적절한 예는 아니겠지만 믿음이란 기도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부모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종교세 논란도 잠잠케 한다.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종교세를 내야한다. 마지 못해서라도 내야 한다. 핵심은 면제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도 내야한다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의 의무에 동참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다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들이랴.

마태복음 17:1-13

엿새 후.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후 엿새 후다. 그러니 아직 지난 주 설교의 잔상이 남아 있을 때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 역발상으로 한다면 이들이 가장 배운 것이 없는 (구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어부들이었기 때문에 말씀보다는 현장학습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도 같은 어부 출신이지만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을 우리가 만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같은 마을 어부출신인 것 같지만 말씀에 대하여 아는 것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세 제자 앞에서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도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보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지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예수님이 미쳐 답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소리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 제자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워 땅에 엎드렸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이 연상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 없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내려 오는 길에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서기관들에게서 주워 들은 것이 있어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말이 맞다고 하시며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우했다고 답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고난 받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성경에서 미리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깨달았다.

// 텔레포트일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을 만났다. 어떻게?는 궁금하지만 답이 없다. 그러나 왜?는 생각할 수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다. 거기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다. 어부였던 세 제자에게는 이야기로만 들었던 구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이해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변화산상에는) 황금 집은 고사하고 초막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초막을 지을까요 하고 물었을까? 베드로가 한 유일한 반응이다. 거할 곳이 많지만 좋은 집이 있는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다. 해 같이 빛나며 빛같이 흰 곳이다. 순결한 곳이다. 죄가 없는 곳이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만 있는 곳이다.

산에서 내려 오면서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한 말을 기억하고 질문했다. 드디어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묵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설명해 주신다. 하늘 음성의 마지막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였다. 예수님이 없으면 구약의 말씀이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참 뜻을 깨달을 수 없다. 이렇듯 변화산 사건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된 하나님나라다.

마태복음 16:21-28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에게 밝히신 후부터 (마태는 이때 주어를 ‘예수께서’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를 사용했다.)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비로소 나타내셨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사람의 일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지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가졌다. 그러나 들어야 할 것을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돌이키시며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 대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베드로가 어느새 사탄의 꾐에 빠졌음을 책망하셨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놓고 기도로 씨름하실 것이다. 예수님께도 내 뜻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방해물, 걸림돌이 된다. 사람의 일 (죽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 (부활)을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는 결국 죽으라는 얘기다. 자아를 죽이라고 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영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덧붙이신다. 스스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나를 (예수를) 위하여 죽으면 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신다. 사람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신다. 여기에 반전이 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히9:27)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신다. 다시말해 죽음 후에 있을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사느냐 죽느냐를 생각하라고 하신다. (영생은 오래 영원히 사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귀며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의 아신바 되어야 한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라는 판결을 받는 것이 곧 스스로는 살았다고 생각하나 죽은 삶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반전의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언급하시면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지금 제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조차 사탄의 꾀를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면 하나님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나라는 나의 이상향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나라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활의 삶을 누리는 나라다.

사람의 일 (죽음) 대신 하나님의 일을 (부활을) 누리라고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일에 대해서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마태복음 16:1-20

예수님에 대한 도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사두개인까지 끼어들었다. 평소에 서로 싸우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손을 잡을 꼴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예수님은 너희가 천기를 구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반문하시며, 다시 한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후 그들을 떠나 가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떡을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룩을 언급하시자 떡을 만들어 먹을 생각에 사로 잡혔었나보다. 먹을 것 걱정이 앞섰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걱정을 하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이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 알려주셨다. // 말씀의 표적이 있는데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주의하라고 하신다. 예수 누룩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섞어 쓸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다. (여기서도 믿음이 작단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리보 가이사랴 지방에 도착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지 물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한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답을 했다. 예수님은 그러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모법답안을 제시하자 모범답안을 베드로에게 알게 한 분이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의 모범답안을 안 것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할 수 있는 답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상기 시켰다. 베드로는 게바 반석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튼튼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교회를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이 이길 수 없다고 하셨다. 교회의 반석이 베드로 개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만 하기에도… 예수님은 산위에서 가르치실 때에 지혜로운 사람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 위에 세우신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다시말해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교회를 이길 수 있는 세상 권세는 없다.

예수님은 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천국 열쇠란 무엇인가? 어렵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이듯이 베드로 또한 천국에서 세례요한만큼 작은 자라는 의미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천국문 앞에서 마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세를 했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라고 책망을 하신다. (마2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열쇠가 없었다. 천국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열쇠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천국 열쇠를 담당하는 자로 살 것이다. 결국은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이다. 그러니 열쇠를 받았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닫는 일이 권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베드로를 게바, 곧 반석이라고 부르신 이유도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교회의 반석이요, 결국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주추돌이 된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은 말씀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

생각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은 본문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5:21-39

예수님은 갈릴리 게네사렛에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게네사렛에 비해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지역이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즉 유대와 이방의 경계가 주 무대였다. 처음부터 이방인은 배제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피하시려고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지도 모르나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유대교의 전통을 벗어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성자 예수님의 적극적인 순종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방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을 메시야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불렀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으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딸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의 왕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방지역까지 발걸음을 옮기신 예수님의 반응은 더디다. 갈릴리 반대편에서 즉시 즉시 즉시 응답하셨던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에게는 먼저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시끄러운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를 보낼까요? 라고 묻자 그제서야 대답하시는데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답하신다. 마치 이방인들을 아랑곳 않는 태도시다. (어떻게보면 예수님께도, 저자인 마태에게도 참 이스라엘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대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가나안 여자는 결국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제 딸을 도와달라고 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자신의 처지를 도와 달라는 것처럼 간청한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다. 이에 가나안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대답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답하셨고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 큰 믿음으로 가나안 여자는 참이스라엘인이 되었다. 이 믿음이 그 여자의 딸을 낫게 했다. 결국 큰 믿음이란 나는 전적으로 무능함을 인정하고 대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따르는 무리를 고쳐주셨다. 말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치유의 형장에서 무리는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렇게 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칠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다. 유대쪽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보이실 때는 무리가 모인 그날 저녁에 표적을 보이셨는데 이방쪽에서는 삼일째야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셨다.

아마도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방지역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차별일까 구별일까?

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위한 복음서라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천국 복음이 유대인에게 국한된 복음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