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조연은 요한이었다. 오늘은 작은 자가 조연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 세례요한의 선포로 천국이 왔다. 천국은 신대륙이다. 원주민이 있는 아메리카가 아니라 완전한 신대륙이다. 누구든지 들어가서 땅을 따먹는 사람이 임자다. 물론 땅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이 통치하신다. 값없이 돈없이 살 수 있는 빈집이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수 있던 때는 요한까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나라의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지 모르나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곳이다. 예수님은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오리라고 한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께 청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 지 못하는 세대라고 하신다. 이것을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놀이는 술래가 피리를 불면 아이들이 춤을 추고 술래가 슬피 우는 행동을 하면 아이들이 가슴을 치는 놀이다. 그런데 술래가 피를 불어도 가슴을 쳐도 반응하지 않는다. 장터에 온 약장수에 넋이 빠졌을까? 아니면 술래가 인싸가 아니라 아싸여서 무시하는 것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아싸’셨다. 요한이 술래가 되어 가슴을 치니 사람들은 슬피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술래가 되어 피리를 부셨지만 사람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요한과 예수님을 술래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한이나 예수님 자신이나 술래의 역할을 온전히 하셨다고. 술래의 역할을 제대로 하셨다는 것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그 행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은 얻는다. 지혜는 곧 예수님이시다. 말씀은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행함으로 실천된다.
//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다. 우리는 영혼이 허기질 때 말씀을 읽으라고 한다. 그러나 혹 영혼이 비대해졌다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착한 행실로 운동을 해야 한다. 들은 말씀대로 살아내야 한다. 술래되신 주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하고 우시면 함께 울어야 한다. 천국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삶이다. 피리를 불고 가슴을 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