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피리를 부신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춤을 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 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1-24)
예수님이 우신 것이다. 그러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가슴을 치지 않았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을 책망하신던 예수님은, 아마도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리라. 그만큼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길 바라셨을 것이다. 기도가운데 저들이 회개치 않음도 말씀의 성취요 자칭 지혜롭고 슬리롭다고 높아진 저들에게 천국복음을 숨기신 분도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대신 천국복음을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에 감사하신다.
저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는 성자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성자 예수님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다. 은혜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다시 가르치신다. 천국복음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하락된 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쉼이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쉼을 얻는다고 하신다. 세상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세상 지혜와 슬기로 따지면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그보다 쉬운 멍에도 없을 것이요 그보다 가벼운 짐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임마누엘이다.
천국복음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우리 주님이 피리를 부시면 춤을 추는 삶이 천국이다. 피리에 맞춰 춤추는 순종보다 내가 피리를 불려는 교만한 자들을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서는 곡을 하실 것이다. 우신다. 그러면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한다. 천국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천국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장터와 같은 세상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다.
주일 아침이당.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를 같이 메자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