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서둘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냈다. 대신 끝까지 남아서 무리를 배웅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 산에 올라가 혼자 기도하셨다. 하루의 마무리를 기도로 하시나보다.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깊은 바다를 (호수라 해야 하나) 지나고 있었다. 깊은 바다에서 제자들이 탄 배는 큰 바람과 물결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밤 사경은 유대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니 새벽 여명을 맞을 시간에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지상에서 처럼 천천히 걸으셨을까 축지법이라도 쓰시면서 걸으셨을까? 바람처럼 걸으셔서 갈릴리 호수에 큰 바람이 불었던 것은 아닐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랐다. 누구라도 놀랐을 것이다. 큰 바람과 물결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유령인가 하여 더 놀랐을 것이다. 제자들은 심지어 비명까지 지르며 놀랐다.
예수님은 온유한 음성으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이때 베드로가 나섰다. “주여 만일 주님이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는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은 “오라”고 답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몇발짝을 걸었을까?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고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서 베드로를 잡아 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짧게? 책망하셨다. 오병이어 표적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질문하는 것은 우문이다. 바다를 가르는 것이 쉬울까? 물위를 걷고 광풍을 멈추게 하는 것이 쉬울까? 대신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게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경배했다.
그들은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다. 그곳 사람들은 주변 동네에도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렸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입었다.
오늘의 삼세번은 ‘즉시’라는 단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후에 즉시 제자들을 건너 편으로 보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놀라 비명을 지르자 즉시 안심시켰다. 또 베드로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자 즉시 손을 내밀어 구해 주셨다. 즉시 즉시 즉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낼 시간이 긴박했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냥 마태가 잘 쓰는 허사에 불과한 것일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의 답변이나 변명은 기록에 없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와 동의어라고 언젠가 묵상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는데 믿음이 작다고 하셨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는 순간 믿음을 잃었다. 주님을 의심하게 하는 일은 바람뿐이 아니다. 혼자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쩌면 바람보다 더 위험하다. 나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네. 이 생각이 위험하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배도 광풍 중에 있었고 예수님도 광풍 중에 물위를 걸어 오셨다. (물론 예수님은 광풍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바람을 그치게 하는 것도 임마누엘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어쩌면 주변 바람은 여전히 불지 모른다. 대신 그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을 여유가 생긴다. (예수님이 유령처럼 물 위를 걸어 나타나시자 풍랑은 아랑곳 않고 예수님께 놀랐던 것처럼)
게네사렛 땅에 있는 환자들도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나음을 얻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리적인 임마누엘이다. 순간적이라도 물리적 임마누엘이 치유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지속적인 임마누엘이 주는 안식이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보다 더 바랄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예수님과 카톡이나 메신저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