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21-39

예수님은 갈릴리 게네사렛에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 게네사렛에 비해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지역이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즉 유대와 이방의 경계가 주 무대였다. 처음부터 이방인은 배제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피하시려고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지도 모르나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유대교의 전통을 벗어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성자 예수님의 적극적인 순종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방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을 메시야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불렀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으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딸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의 왕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방지역까지 발걸음을 옮기신 예수님의 반응은 더디다. 갈릴리 반대편에서 즉시 즉시 즉시 응답하셨던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에게는 먼저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시끄러운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를 보낼까요? 라고 묻자 그제서야 대답하시는데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답하신다. 마치 이방인들을 아랑곳 않는 태도시다. (어떻게보면 예수님께도, 저자인 마태에게도 참 이스라엘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대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가나안 여자는 결국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제 딸을 도와달라고 할 수 있으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자신의 처지를 도와 달라는 것처럼 간청한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다. 이에 가나안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대답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답하셨고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 큰 믿음으로 가나안 여자는 참이스라엘인이 되었다. 이 믿음이 그 여자의 딸을 낫게 했다. 결국 큰 믿음이란 나는 전적으로 무능함을 인정하고 대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따르는 무리를 고쳐주셨다. 말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치유의 형장에서 무리는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렇게 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칠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다. 유대쪽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보이실 때는 무리가 모인 그날 저녁에 표적을 보이셨는데 이방쪽에서는 삼일째야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셨다.

아마도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방지역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차별일까 구별일까?

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위한 복음서라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천국 복음이 유대인에게 국한된 복음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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