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1-20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보내어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게 했다. 마침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고발했다. 예수님은 저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고 반문하셨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예로 부모 공경의 계명과 잘못된 전통을 언급하신다. 부모 공경이 마땅함에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부모님을 공경할 것이 없다고 불효하는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책망하신다. 이런 전통을 외식이라고 하신다. 외식이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예수님은 산상에서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해 가르치실 때 말씀하셨다. 말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을 떠난 자들.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 모양이다. 하나님의 계명 대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주님을 바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요 헛되다고 하신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옆에서 이 말을 들었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상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 비유가 왜 바리새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지 모르는 듯하다. (왜냐하면 뒤에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사람의 계명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뽑으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두라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결국 그들은 둘이 다 구동이에 빠질 것이라고 하신다.

베드로가 이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고 책망? 하시면서 설명해 주신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결국 배설된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들, 즉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더럽다고 하신다. 악한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저짓증언과 비방 등등. 이런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은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사람의 계명은 사람들의 꾀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의도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전도자가 깨달은 것도 이와 비슷하리라.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문제는 많은 꾀들이 악인의 꾀라는 것이다.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야 된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마태복음 14:22-36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서둘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냈다. 대신 끝까지 남아서 무리를 배웅하셨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 산에 올라가 혼자 기도하셨다. 하루의 마무리를 기도로 하시나보다.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깊은 바다를 (호수라 해야 하나) 지나고 있었다. 깊은 바다에서 제자들이 탄 배는 큰 바람과 물결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밤 사경은 유대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니 새벽 여명을 맞을 시간에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지상에서 처럼 천천히 걸으셨을까 축지법이라도 쓰시면서 걸으셨을까? 바람처럼 걸으셔서 갈릴리 호수에 큰 바람이 불었던 것은 아닐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랐다. 누구라도 놀랐을 것이다. 큰 바람과 물결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유령인가 하여 더 놀랐을 것이다. 제자들은 심지어 비명까지 지르며 놀랐다.

예수님은 온유한 음성으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이때 베드로가 나섰다. “주여 만일 주님이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는 베드로의 요청에 예수님은 “오라”고 답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몇발짝을 걸었을까?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고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서 베드로를 잡아 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짧게? 책망하셨다. 오병이어  표적처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질문하는 것은 우문이다. 바다를 가르는 것이 쉬울까? 물위를 걷고 광풍을 멈추게 하는 것이 쉬울까? 대신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게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경배했다.

그들은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다. 그곳 사람들은 주변 동네에도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렸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했고 손을 댄 자는 다 나음을 입었다.

오늘의 삼세번은 ‘즉시’라는 단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 후에 즉시 제자들을 건너 편으로 보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놀라 비명을 지르자 즉시 안심시켰다. 또 베드로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자 즉시 손을 내밀어 구해 주셨다. 즉시 즉시 즉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낼 시간이 긴박했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냥 마태가 잘 쓰는 허사에 불과한 것일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의 답변이나 변명은 기록에 없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와 동의어라고 언젠가 묵상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는데 믿음이 작다고 하셨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는 순간 믿음을 잃었다. 주님을 의심하게 하는 일은 바람뿐이 아니다. 혼자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쩌면 바람보다 더 위험하다. 나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네. 이 생각이 위험하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배도 광풍 중에 있었고 예수님도 광풍 중에 물위를 걸어 오셨다. (물론 예수님은 광풍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바람을 그치게 하는 것도 임마누엘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어쩌면 주변 바람은 여전히 불지 모른다. 대신 그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을 여유가 생긴다. (예수님이 유령처럼 물 위를 걸어 나타나시자 풍랑은 아랑곳 않고 예수님께 놀랐던 것처럼)

게네사렛 땅에 있는 환자들도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나음을 얻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리적인 임마누엘이다. 순간적이라도 물리적 임마누엘이 치유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지속적인 임마누엘이 주는 안식이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보다 더 바랄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예수님과 카톡이나 메신저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임마누엘이다.

 

마태복음 14:13-21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분봉왕 헤롯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였을까 아니면 하시던 대로 기도하기 위해서 였을까 예수님은 요한이 죽어 장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들 타고 빈 들로 떠나셨다. 배를 타시고 떠나셨으니 건너편을 가셨을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떠나시자 여러 고을을 돌고 돌아서 걸어서 예수를 찾아 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 온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무리들이 데려 온 병자를 고쳐주셨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예수님께 날이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라고 말했다. 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치유사역과 무리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한 제자들. 무리의 당면한 필요성은 무엇이었을까? 아직까지 제자들은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낼 필요 없다 하시며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뿐이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은 떳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는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은 떡을 무리에게 나눠 주었다. 무리가 다 배불리 먹었다. 남은 조각을 다시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어른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다.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광야 사십년 동안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 하다. 엘리야를 통해 사르밧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엘리사를 통해서는 선지자 생도의 아내였다가 과부된 여인의 한병 기름에서 빚을 갚고도 남을 만큼 기름을 만들어 내셨다. 하나님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셨다.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땅에 오셨다고 하신다. 배고픔을 면한다고하여도 사람은 죽는다. 요한도 죽었다. 생명의 떡, 하늘 양식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다. 당시 제자들에게도 어려운 말씀이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말씀의 능력은 그냥 말씀을 암송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삼위하나님의 사귐에서 나온다. 성서나 말씀을 적은 종이가 부적처럼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으니 주를 따르겠다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다. 아는 것은 사귄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데 급급한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을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가가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우리에게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신다. 내가 가진 오병이어로 계산하지 말고 임마누엘을 누리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4:1-12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는다. 헤롯은 예수를 세례요한의 부활로 생각했다. 요한의 부활의 능력이 예수 안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태는 요한의 죽음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요한은 헤롯이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한 일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가 헤롯의 미움을 사 옥에 갇혔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백성들의 난동을 두려워하여 옥에 가둬둔 상태였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으로 헤롯을 기쁘게 하자 헤롯은 무엇이든 달라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요구하고, 헤롯은 백성들이 난동을 부릴까 근심하였으나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요한의 목을 벤다. 이렇게 요한은 죽고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장사했다.

요한은 죽었다. 세상적으로보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킹메이커로 자처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요한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았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요한은 물러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요 3:28-29 새번역) 그리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여야 한다.” (요 3:30 공동번역) 라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요한은 신랑의 소리에 기뻐한 자였다. 그는 죽었다. 물론 그는 죽었으나 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우리처럼 기록으로라도 듣지 못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태복음 본문은 어디가고 요한복음으로 또 마무리…

 

세상 임금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 요한의 부활을 떠올렸다. 요한의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한다고 생각했고 신하들에게도 말했다. 그러나 오늘 핵심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 즉 부활이 아니라 요한의 죽음이다. 선지자 중이 선지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도 죽는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는 영생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서로 안다는 것은 사귐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삼위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사람은 죽은자요 사귐이 있는 자라야 영생하는 자다. 영생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마태복음 13:44-58

천국은 자기 소유을 다 팔아 사야할 보화가 감추인 밭과 좋은 진주다. 이구동성으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고 천국의 가치를 말한다. 도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ㅛ러나 ‘자기의 소유 전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면 살 수 있다. 따라서 못살 사람이 없다. 부자청년은 차마 사지 못했고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한 과부는 샀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고 이 가난한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았다고 하셨다.

다시 비유를 살펴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보화가 감추인 밭이 아니라 밭에 감추인 보화다. 밭을 사는 이유는 보화때문이다. 천국은 보화와 같다. 사람들은 일석이조를 좋아한다. 보화도 보화지만 밭에도 관심이 많다. 주님과 (보화와) 재물을 (밭을) 겸하여 섬기려 한다. 우리의 촛점이 흐려져서는 안된다. 애초에 보화가 감추인 밭은 가치가 없는 땅이었을 것이다. 버려진 밭이 었을 것인데 그곳에서 우연히 보화를 발견했기에 가치있는 땅이 된 것이다. 결국 그 땅의 가치는 보화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나라는 주님이라는 보화가 있는 곳이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천국을 좋은 진주라고 하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같다고 하신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땅이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예수님은 설명하셨다. 결국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다. 진주 장사는 결국 참 보배되신 (좋은 진주이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찾고자) 하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이 천국이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천국은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고 하신다. 천국을 완성된 파라다이스라고 하지 않으시고 완성을 향해 몰아가는 그물과 같다고 하신다.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려진다. 세상 끝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천국은 다분히 종말적이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는냐 하시니 제자들을 ‘네’하고 대답한다. (정말 깨달은 것인지.) 예수님은 깨달았으면 새것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옛것 (율법의 가르침) 모두를 보화로 여기는 집주인과 같은 하나님나라의 제자가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으로 가셨다. 고향에 있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다.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 즉 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다. 모친 마리아와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모두 혈통으로만 알고 있다. 예수님의 여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단 말인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만 아는 고향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 영접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자신을 믿지 않는 고향사람들에게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

천국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사야한다.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은 천국 보화를 사는 것이다. 댓가는 자기의 모든 소유다. 아무리 가난해도 살 수 있다.

“오호라 너히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돈 없이 값 없이는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소유 모두를 팔아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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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천국을 좋은 진주라고 하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장사꾼과 같다고 하신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땅이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예수님은 설명하셨다. 결국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다. 진주 장사는 결국 참 보배되신 (좋은 진주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찾은) 사람이다. 곧 믿음의 사람이 천국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산자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다. 결국 사람이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6) 라고 예수님은 도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