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22-30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셔서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볼 수 있게 되자 무리가 다 놀랐다. 드디어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반응이 나왔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아닐까하여 수군거렸다. (무리들의 수준이 자칭 선생된 바리새인들보다 낫다.)

그러나 이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정했다. 무리들의 반응에 즉각적으로 이전처럼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비방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이번에는 더 강하게 설명하신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설 수 없다. 너희들 중에 축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러면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 하시며 축귀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판단에 반기를 들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은 귀신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신다. 하나님나라가 사탄의 나라를 쫓아냈다고 하신다. 하나님나라가 사탄의 나라보다 더 강하다고 하신다. 하나님나라가 사탄을 결박했다고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임마누엘을 누린다. 예수님과 함께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로 모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나라를 황폐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는 모양새다.

성령하나님을 힘입어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귀에서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나라대신 자신들의 나라, 즉 전통과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오래된 포도주 맛에 길들여진 그들은 새포도주를  포기한 것이다.

당대 선생이라고 자처한 바리새인들이 옛 것을 지키기 위해 새 것을 알기를 포기했다고하나 할까?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이면 可以爲師矣(가이위사의)니라

예수님은 옛 율법을 사랑으로 새롭게 완성하신 선생님이시다. 예수님은 선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선생님이시다.

마태복음 12:14-21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선을 (하나님의 뚯을) 행하는 것이 옳다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분명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한 개인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의미보다 훨씬 강하다. 새포도주를 그냥 바닥에 쏟아 버리겠다는 의미다.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주어 담을 수 없게 하겠다는 의미다. 진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셔서 치유의 사역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사역을 하러 오시지 않으셨다. 치유로 얻은 인기로 정치를 하러 오시지 않으셨다. 회개와 천국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 복음은 심판을 동반한다. 심판이 없다면 복음이 복음되지 않는다. 그래서 치유로 들뜬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치유자나 정치가로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표현대로 큰 자가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그것도 죽기까지 섬기로 오셨다.

그래서주님은 다툼을 피하셨고 언성을 높이시지도 않으셨다. 큰 자로 추앙받지 않으셨다. 대신 작은 자들을 찾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자를 고쳐주셨다. 저들이 심판 때에 이길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심판 때에 예수의 이름을 바라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의논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오셨다. 성부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 영으로 함께 하셨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부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라고 우리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복음을 누릴 수 없다.

마태복음 12:1-13

안식일. 밀밭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 예수님을 책잡을려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고발한다.

예수님은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이야기와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는 제사장들의 직무를 언급하신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분이라고 소개한다. 성전보다 더 크다는 표현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안식일을 명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라고 하신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산위에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난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 더군다나 추수할 때 곡식을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지 말고 또 떨어지 이삭도 줍지 않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남겨 두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시장하여 추수가 끝난 (추수가 끝나지 않았으면 밀밭지기가 있어서 함부러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것이다.) 밀밭을 지나면서 시장한 제자들이 한 행동은 정죄받을 행동이 아니었다. 문제는 안식일에 한 이 일이 안식을 어긴 것이라고 딴지를 건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신다

밀밭을 떠나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예수님께 도전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하시며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주일성수! 주일 예배당에 모인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헛될뿐이다. 주님은 자비를 원하고 예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실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비란 결국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베풀어야 할 성도들의 사랑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성도들에게 권하는 영적예배의 핵심이다. 이 세대와 다르게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일에 선을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음… 구체적인 적용을 생각해보자

 

 

마태복음 11:20-30

예수님은 피리를 부신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춤을 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 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1-24)

예수님이 우신 것이다. 그러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가슴을 치지 않았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을 책망하신던 예수님은, 아마도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리라. 그만큼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길 바라셨을 것이다. 기도가운데 저들이 회개치 않음도 말씀의 성취요 자칭 지혜롭고 슬리롭다고 높아진 저들에게 천국복음을 숨기신 분도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대신 천국복음을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에 감사하신다.

저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는 성자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성자 예수님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다. 은혜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다시 가르치신다. 천국복음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하락된 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성취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쉼이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쉼을 얻는다고 하신다. 세상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세상 지혜와 슬기로 따지면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면 그보다 쉬운 멍에도 없을 것이요 그보다 가벼운 짐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임마누엘이다.

천국복음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우리 주님이 피리를 부시면 춤을 추는 삶이 천국이다. 피리에 맞춰 춤추는 순종보다 내가 피리를 불려는 교만한 자들을 책망하신다.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서는 곡을 하실 것이다. 우신다. 그러면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한다. 천국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이다. 천국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장터와 같은 세상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다.

주일 아침이당.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를 같이 메자고 하신다.

마태복음 11:11-19

어제의 조연은 요한이었다. 오늘은 작은 자가 조연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 세례요한의 선포로 천국이 왔다. 천국은 신대륙이다. 원주민이 있는 아메리카가 아니라 완전한 신대륙이다. 누구든지 들어가서 땅을 따먹는 사람이 임자다. 물론 땅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이 통치하신다. 값없이 돈없이 살 수 있는 빈집이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수 있던 때는 요한까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나라의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지 모르나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곳이다. 예수님은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오리라고 한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께 청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 천국이다.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 지 못하는 세대라고 하신다. 이것을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신다. 놀이는 술래가 피리를 불면 아이들이 춤을 추고 술래가 슬피 우는 행동을 하면 아이들이 가슴을 치는 놀이다. 그런데 술래가 피를 불어도 가슴을 쳐도 반응하지 않는다. 장터에 온 약장수에 넋이 빠졌을까? 아니면 술래가 인싸가 아니라 아싸여서 무시하는 것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아싸’셨다. 요한이 술래가 되어 가슴을 치니 사람들은 슬피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술래가 되어 피리를 부셨지만 사람들은 춤을 추지 않았다. 요한과 예수님을 술래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한이나 예수님 자신이나 술래의 역할을 온전히 하셨다고. 술래의 역할을 제대로 하셨다는 것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그 행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은 얻는다. 지혜는 곧 예수님이시다. 말씀은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행함으로 실천된다.

//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다. 우리는 영혼이 허기질 때 말씀을 읽으라고 한다. 그러나 혹 영혼이 비대해졌다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착한 행실로 운동을 해야 한다. 들은 말씀대로 살아내야 한다. 술래되신 주님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하고 우시면 함께 울어야 한다. 천국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삶이다. 피리를 불고 가슴을 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