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1-10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추수꾼으로서의 지침을 주시고 또 다른 동네로 천국복음을 전파하러 떠나셨다.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하지 못했나보다.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건만 요한의 외침은 완전하지 못했다. 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유대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면 유대나라가 천국이 (유대의 독립? 회복?)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예수님이 수 많은 무리들의 추앙을 받으며 유대의 왕으로 혁명을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마을 저마을 다니시며 무리를 피하시고 강한 천국이 아닌 온유한 천국을 전파하고 다니고 계셨다.

요한은 옥에 갇혀서도 자신이 닦아놓은 길로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 지 다 듣고있었다. 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정치적으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으로 요한에게 대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요한의 질문의 ‘내가 그다’라고 대답하셨으면 요한은 예수님이 언제 천국혁명을 일으키실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그다’라는 직접적인 대답대신 가까이 온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 말씀으로 설명하심으로 자신이 오실 그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읽고 읽으면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가르치신 천국복음을 복기해야 한다. 맹인이 보며 못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는 천국의 완성이 아니라 전조현상이다. 천국은 가난한 자들이 기뻐하는 나라다.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을 차버리는 사람이다. 이 새로운 천국관으로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만큼 실족하기 쉽다는 뜻이리라.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은 가난한 자들의 회복보다 이적과 기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가 떠난 후에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신다. 요한이 한 것이 무엇인지 상기 시키신다. 요한을 선지자중의 선지자라고 추켜세워 주신다. 요한의 사역을 말씀의 성취라고 알려주신다.

회개는 어쩌면 쉽다.  돌아서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천국백성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돌이켰으면 새로운 방향으로 가야한다. 새로운 방향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천국백성의 삶을 살 수 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주의 말씀대로 살아내야 한다. 어렵다.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유다.

마태복음 10:34-42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요 칼이라고 하신다.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리요”라고 강한 어투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고후 6) 편지했었다. 천국 복음은 알곡과 가라지를 솎아내는 키질이다. 물론 평안의 복음은 성도들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먼데 있지 않고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보다 자기 집안 식구를 더 사랑하는 자는 임마누엘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도 예수님의 제자로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자는 죽을 것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영생이다. 놀라운 것은 이 영생을 누리는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통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산위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행위를,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면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다. 은밀하게 한다는 뜻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이름으로라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기 상을 이미 받는 행위다.)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라고 하신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은밀한 이웃사랑이다.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은밀한 이웃사랑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는 역설적으로 추수꾼들에게 선지자가 되라, 의인이 되라, 제자가 되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부르신 추수꾼이 되라고 하신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0:24-33

예수님은 청출어람을 옛시인의 허사라고 말씀하신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기껏해야 선생만큼 되고 상전같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선생이나 주인보다 못한 것은 당연하다.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 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축귀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천국복음을 전파하면 당연히 귀신의 종을 의지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진리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천국의 비밀도 결국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이땅에 빛으로 오셨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바로 이 빛이 예수님이시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요 1:18 공동번역)

그래서 내가 선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시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청출어람이 없겠지만 세상에는 청출어람이 허사가 아니라 실사가 된다. 우리끼리는 누가 선생이고 누가 제자가 아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생명되신 예수님이 빛으로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하나님께로부터 난 추수꾼들(제자들)은 빛에 대해 증언한다. 빛되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광명한 데서 증언한다. 예수님이 비유로 (어둠가운데) 가르치신 천국복음을 제자들에게는 (밝은 가운데)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천국복음전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양들이 이리가운데서 해야 하는 일이다. 추수꾼들이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쳐주신다.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추수꾼으로 (제자로) 인정하신다고 하신다. 만약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그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보다 더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없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보혜사 성령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마태복음 10:16-23

추수밭에서 일하는 것은 예수님께 치유와 축귀와 회복의 권능을 받아도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한마디로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다.

// 천국복음을 가졌다고 우리가 세상을 이긴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다. (요 16:33)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신다. 세상을 이기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고. 그렇지만 담대하라고.

이리 같은 세상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수꾼들을 공회에 넘겨 유죄를 받게하려고 할 것이다. 한편으로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것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천국복음을 증거할 기회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천국복음은 환난가운데 증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쩌다 재수 없으면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천국복음전파는 고난이다.

그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천국복음전파를 하기 위해서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 세상의 모든 방법을 써야한다. 그러나 전도자는 세상에 책잡힐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더욱더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뱀같이 지혜로운면서도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는 어렵다.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아버지의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임마누엘이다. 당연히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제자들 한명한명과 물리적으로 가시적으로 함께 하실 수 없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다.

이리들 가운데 다툼과 살인이 창궐할 것이라고 하신다. 가족관계마져 무너진다. 이리들 가운데서 양으로 (순결한 삶을 살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구원의 약속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근거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는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하신다. 이동네에서 박해하거든 저동네로 피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실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신다. 제국주의적 복음에 익숙한 우리들은 세상과 맞서 싸우라고 가르치고 배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르다. 물러나라고 하신다. 진것 같아도 담대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이기셨기 때문이다. 나도 이기고 싶으면 예수 안에 거하면 된다. 임마누엘이다. 괜히 내가 이기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다. 아버지의 성령을 모셔야 한다. 예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누려야 한다.

오늘도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소서.

마태복음 10:1-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하셨다. 그 기도의 응답은 제자들 자신이 추수꾼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제자 열둘을 부르셔서 추수할 때 필요한 도구, 즉 축귀와 치유와 회복의 권능을 주셨다. 열둘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추수꾼이 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특별한 자격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추수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추수꾼이 되라고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열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나나인) 그리고 가룟 유다 였다.

예수님은 이 열둘을 파송했다. 이들에게 이방인들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축귀와 치유와 회복의 도구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라고 하셨다. 병든 자는 고치고 죽은 자는 살리며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하셨다. 열둘이 받은 것은 무엇인가? 저들이 받은 것이 천국이다. 예수님의 권능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이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준 권능외에 다른 것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행에 필요한 돈도, 배낭도,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다. 천국복음을 전파하면서 합당한 자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그 집에서 머물라고 하신다. 영접하지 않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돌아나오라고 하신다. 영접하지 않는 곳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이사야는 환상중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기도하면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열둘에게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권능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제자의 길은 끊임없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길이다. 열둘 중의 한명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자라고 기록된다. 언젠지는 모르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었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리라.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칠십인 전도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 권능을 받고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 임마누엘이다.

수많은 무리에서 열둘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는 결국 짤려 나갔다. 임마누엘을 누리는 자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