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27-38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시자 맹인들은 집에까지 따라들어왔다. 예수님께서는 두 맹인에게 (마태는 둘이라는 숫자를 정말 좋아한다.) 믿느냐 물으셨고 두 맹인은 네하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저들의 믿음대로 고쳐주셨다. 믿음은 눈을 밝게한다.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깨닫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머무시던 집에 증인들도 여럿 있었을 것이니 이 사건을 숨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전파했다.

그들은 나갔지만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축귀하셨고 말못하던 사람은 말하게 되었다. 무리들은 놀랍게 여겼다. 무리중에 있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위지하여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다시한번 4장 23절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한다. 천국복음이다. 귀신의 왕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모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대신 병과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목자, 통치자가 아니셨다. 그러니 그들은 고생하고 기진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할 곳이 무궁무진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백성이 적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추수꾼은 아무나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추수하는 주인, 즉 하나님이 세우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백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 졸립다.

마태복음 9:14-26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저들의 질문에는 예수님도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찌 알리요.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며 40일 동안 온전한 금식을 하셨던 분이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기도 금식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감히? 금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예수님께 도전을 하다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다. 금식은 나는 죽고 온전히 주님만 사는 행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그래서 나의 삶을 주님께 위임하는 행위다. 따라서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시는 예수님도, 예수님이 함께해 주시는 제자들도 금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임마누엘은 결혼잔치라고 하셨다. 신랑되신 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에는 금식해야 된다고 하셨다. 만약 신랑되신 주님 뜻 대신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에는 금식해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이다. 예수님은 이 천국을 하나님나라를 임마누엘이라고 설명하신다. 이것은 새포주를 새부대에 담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랑을 율법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새포도주를 옛부대에 담는 것이다. 잘못하면 율법의 참뜻도 사라지고 사랑도 잃어버리게 된다. 새포도주는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이다. 그리고 새부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을 행할 수 있다.

관리의 딸의 부활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의 치유는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담는 예다. 관리가 와서 내 딸이 방금 죽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시면 낫겠다고 요청한다. 예수님께서 관리의 딸을 고쳐주시러 길을 가실 때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에수님의 겉 옷만 만져도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 관리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물리적 접촉을 통한 임마누엘을 원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사람들은 임마누엘의 능력을 비웃을지 몰라도 임마누엘이야 말로 능력이다. 임마누엘의 능력을 믿음으로 관리의 딸도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임마누엘을 누렸다. 그리고 그 소문이 그 온땅에 퍼졌다. 임마누엘은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한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에는 임마누엘이 가시적으로 물리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는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더 이상 모실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늘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돌보신다. 대신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 무엇인가.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주님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말씀이다.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임마누엘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임마누엘을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마태복음 9:1-13

예수님은 박해하는 가다라를 떠나 배를 타고 본 동네로 돌아오셨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본 동네에서 다시 치유의 사역을 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침상채 들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 중풍병자가 낫고자 하여 친구들에게 예수님께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 것인지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 데려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병자나 친구들 모두 예수님께 가면 낫겠다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작은 자”는 교만하지 않은 자를 뜻하는 것 같다. 낮은 자와 같다. 중풍병자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세리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중풍병자를 예수님은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기도를 함으로 자기상을 이미 받은 바리새인 같은 서기관들이 속으로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중풍병자가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는 이적으로 증명하셨다. 무리는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이 죄사함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사건도 기록한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 사건 다음에 자신 사건을 넣었다는 것은 어쩌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의롭다 함을 받은 세리가 자신임을 암시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여간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마태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마태의 집에도 가셨다. (베드로의 집에도 가셨듯이) 그리고 마태의 집에서 다른 세리들과 소위 죄인들이 모여 예수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직접 항변하지도 못하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실 수 있느냐고 따졌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답을 하신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미 6)고 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확인하신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끼리 하이파이브를 주고 받을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스스로를 작은 자로 여기는 자, 낮은 자로 여기는 자, 그래서 예수 앞에 나오는 자를 구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