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에서 (성경으로) 사두개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는 소식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사를 대동해서 다시 예수님께 도전? 한다.
(선공) 율법사가 먼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라고 답하셨다.’둘째도 그와 같으니’는 첫째와 둘째의 중요성이 같다는 의미도 되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같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후공) 이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에 감동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것은 어찜인지 추가 질문을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보충질문을) 하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을 자손이 되는지 물으셨다. 바리새인 중에 아무도, 단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날 부터 감히 예수와 논쟁하려는 자가 없었다.
율법사의 선공은 구약을 정리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을 줄줄 외우고 묵상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객관식이다. ‘무엇입니까?’의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후공은 암기문제가 아니라 해석이 필요한 주관식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사라 하여도) 누구의 자손이냐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어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 직강을 수강생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어찌에 대해서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다윗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는데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가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같은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어떻게나 어찌를 따지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같은 것임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보다는 어떻게나 어찌를 따지면서 탁상공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도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