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36-51

예수님은 계속해서 세상 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다. 성자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성부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노아의 때와 같이 기한(기일)이 정해져 있다. 주의 재림 때도 정해져 있다.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면 사람이 한번 죽는 날과 죽는 때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홍수가 나서 사람들을 다 멸하기까지 사람들은 물의 심판을 깨닫지 못했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같다고 하신다.

바울은 히브리 서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라고 세상 끝을 설명한다.  음! 그렇다면 세상 끝은 주님의 오심과 주님의 재림이다.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이다.

세상 끝 날 사람의 운명은 둘로 나뉜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운명은 둘로 나뉜다. 한사람은 데려가고 한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 이 운명은 주가 임하는 날 깨어있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어느 날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정말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신다. 깨었는 것을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은 주인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다. 주인은 자신이 올 때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종을 보면 그 종을 복되게 하신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종에게 맡긴다.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주인이 와서 그 종을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할 것이다. 이것이 화다.  슬피 울며 이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

세상 끝은 사람이 한번 죽는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특별히 가난한 형제들을 돌봐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적용으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를 자주 언급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사랑이요 이웃사랑이다. 한편 불순종을 술취함으로 방탕으로 적용하신다.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가난한 자들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화를 면할 수 없다고 하신다.

우주적인 ‘세상 끝’은 더디 올지 모른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그러나 개개인의 세상 끝은 멀지 않다. 내가 죽어 심판대에 서는 날이다.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될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라는 예수님의 판결을 받을지. 우리는 세상 끝에 서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열매로 우리를 아신다. 행위대로 갚으신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사들의 환영를 받는다.

사족: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잠언 29:2) 정부가 우리를 즐겁게 하지 못한다. 의인이 많아져야 한다. 깨어있는 종이 많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