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4:1-5:1

4장은 남자의 노래다. 신랑의 노래다. 목자라 신부도 양을 치면서 접하는 감정으로 노래한다. 신부를 흠없는 새끼 암양으로 노래한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노래한다.

메시지 번역은 9절을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대가 나를 보는 순간, 난 사랑에 빠졌어요. 그대의 눈길 한 번에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번역한다. 신랑이 신부를 보고 한눈에 반한 것이라는 것과 다르다. 신부의 눈길에 신랑이 반했다고 한다.

신랑은 신부될 여자를 항상 주목했을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한번 마주쳤는데 그 때 한 눈에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쭉 주목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준것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시말해 남자의 짝사랑이 여자의 눈길 한번으로 완전한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다. 남자는 여자도 자신을 사랑할 것을 눈길 한번으로 안 것이다.

5장 1절은 남자, 곧 신랑이 혼인잔치의 주인됨을 노래한다. ‘나’라는 표현이 매 단어에 붙는다. ‘내 누이’, ‘내 신부’, ‘내가’, ‘내 동산’, ‘나의 몰약’, ‘나의 꿀송이’, ‘내 포도주’, ‘내 우유’, ‘나의 친구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남자는 여자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 아니라 쭉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한번 눈길을 주자, 그 한눈에 여자를 사로잡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다. 나를 주목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주님께 눈길 한번 돌렸을 뿐인데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주셨다. 나로 하여금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셨고 주님의 신부로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게 하신다. 나에게도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노래불러 주신다.

오늘도 흠없이 살아가야 할 이유다. 흠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햐 할 이유다.

아가 3

여자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 사랑하는데 찾고 찾아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지금 옆에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안 거리나 큰 길에서 찾았다는 것은 여자의 행동이 헛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남자는 목자이기 때문이다. 어떤면에서 여자는 남자가 목자보다 성안에서 인정 받는 자였으면 하는 헛된 꿈을 꿨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당연히 목자인 남자를 (잘) 알 수 없다. 그제서야 여자는 세상은 알아 주지 않으나 자신의 연인 남자를 만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세상은 사랑을 훼손하는 가치들로 가득하다.

프로포즈를 받은 여자는 잠시나마 꿈에 사랑의 이유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았던 것 같다. 이왕이면 키도 크고 잘생기고 대머리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연봉도 많고… 막상 결혼을 앞두자 남자에 대한 사랑보다 자랑거리를 찾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사랑하는 남자를 보게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남자를 왕으로 인정하게 하게 한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자를 여왕으로 인정하게 할 것이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이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신랑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다. 모습만이 아니다. 멸시받고 버림받고 간고를 많이 겪어 우리의 질고를 아시는 분이시라고 한다.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신데 이땅에 흑수저로 나셨다. 사람들이 결코 귀히여기지 않았다. 이런분이 우리 신랑되신다. 신랑되신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찾고 찾고 또 찾는가? 은혜와 평강밖에 무엇을 또 바란단 말인가? 잠시라도 한눈팔지 말자.

아가 2:8-17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알고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과 같다. 여자들은 특별히 남자의 목소리에 매료된다고 한다. 그리고 관심받기를 좋아한다.

연인이 프로포즈를 한다. “나의 사랑, 나의 님이여 일어나 함께 갑시다.” 힘든 시절은 지나고 새날이 왔다고 노래한다. 남자는 비둘리 소리, 비둘기로 우화되는 여인을 주목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남자는 여자와의 사랑이 꽃이 피고 열매 맺어가는 것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한다. 사랑이 허물어지는 것은 정말 작은데서 시작한다.

16절은 임마누엘의 그림자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여자는 노래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양떼를 돌아보듯 목자의 일을 일찍 마치고 돌아와 자신을 돌아봐 달라고.

‘너는 내꺼다’라고 말해도 ‘나는 네꺼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한몸을 이루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는 남자의 일방적인 이끔이 아니다. 남자를 위하여도 여자를 위하여도 아니다. 사랑은 ‘우리를 위하여’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도 우리에게 소망을 두시고 일하신다.

아가 1:1-2:7

솔로몬의 아가. 노래중의 노래. 시. 펴자마자 어렵다.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 메시지에는 화자가 누구인지 구분하는 표시가 되어있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더 쉬운것은 아니다. 하여간 솔로몬이 저자라면 이 노래는 그가 지은 천다섯 편중의 (왕상 4:32) 제일가는 노래가 된다. 노래는 편지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가야 하는데.

확실히 남자는 눈으로 사랑을 하나보다. (9,10,15) 이에 반하여 여자는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사랑을 한다. 남자는 여자만 보는데 여자는 자신도 본다. 남자는 사랑을 해도 양치는 일을 제대로 한다고 착각하나 여자는 사랑을 생각하느라 포도원지기 역할도 제대로 못했음을 고백한다.

주님이 나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실까? 나는 주님의 어여쁘고 어여쁜 신부일까? 성도 (천사) 들은 나에게 믿음의 경주를 잘하고 있다고 금장 은장 훈장을 달아줄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러면 나는 주님을 나의 깃발로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주님이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을 안고 계심을 충만히 느끼고 있는가? 임마누엘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 일주일만에 돌아왔다.

마태복음 26:36-5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주님. 여덟명의 제자들은 여기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은 좀 더 데리고 가서 기도 하신다. 여덟은 기도를 할 줄 몰랐을까? 셋을 데리고 가신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설까? 예수님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셋에게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하시고 혼자 좀 더 나아가서 기도하셨다. 고민하여 죽게되었다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다. 예수님은 죽음 잔이 예수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덧붙이셨다.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왔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말씀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기도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는 육신의 약함을 아셨을까. 예수님은 다시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셨다. 이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는 내뜻을 구하다가 주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힘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을 때도 그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세번째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다. 순종할 힘을 받았다.
예수님은 돌아오셔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자가 팔리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때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데리고 왔다.
아침에 삐끗한 허리가 온 몸을 불편하게 한다.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고민하며 기도하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의 잡히시고 죽으심에 대한 기도를 드렸어야 했다. 성부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다. 기도하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에 따라 잤던 결과다. 나도 얼마나 자주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