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6 (1-6)

시인은 예루살렘에서(시온에서)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의 귀환에 ‘꿈인지 생신지’ 라고 노래한다. 그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함박웃음을 지었으며 흥겨운 노래를 불렀다. 아마 감사의 찬양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포로귀환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계셔서 행하신 큰일에 놀라워 했다. 시인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기쁨을 노래한다. 그리고 잡혀간 포로들이 사막에 물이 흐르듯 돌아오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의 노래를 한다. 그런데 시인은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고 노래할까? 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고 노래할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게 한다. 씨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시인은 예레미야 선지자들 떠올리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거두어 들이신다 (성취하신다).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씨가 뿌려지지만 말씀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요,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들에게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라고 권면의 노래도 하는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 때로는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 들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씨를 뿌린 사람이 직접 단을 거두어 들이지 못할지라도 완전한 성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라면 (이 땅에서의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일에 나도 속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추수의 노랫소리를 흥겹게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이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기쁨으로 약속을 받는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눈물나는 일이다. 기쁨으로 거둘 소망이 없이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거두신 (성취하신) 말씀의 열매들을 보라고…

 

시편 125 (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히 감싸(품어) 주신다.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다. 시온 산, 하나님의 품은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에게는 악인들의 통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그냥 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 시민권을 둔 시인을 하나님을 지켜주신다.

시인은 노래한다. 선한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해 달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악인들은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악인들끼리 몰려다닐 것이다.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평강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2:20 공동번역)

시편 124 (1-8)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신(셨)다고 노래한다. 그것도 대적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 우리편에 계셨(신)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만에 하나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다면도 노래한다. 대적들의 노여움이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몸뿐만 아니라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한다. 홍수정도가 아니라 대형 쓰나미가 덮치듯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반복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셨기 때문에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우리가 살아났고 사냥꾼의 올무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노래한다. 내가 발버둥처서 올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올무를 끊어주신 분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고 노래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편지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편에도 계신다.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실뿐 아니라 우리 영혼의 갈급함도 채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편에 계신 이유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편지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처럼 (시 44:22)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도들이 넉넉히 이겼다는 것을. 시편기자도 노래했고 바울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편에 계셨(신)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우리 편에 계신다고.

임마누엘!

시편 123 (1-4)

시인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주를 향한다. 시인이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주를 바라보는 이유는 단순히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인이 손으로 어디를/무엇을 가리키시는 지 주의 깊게 본다. 시인은 주인이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손짓을 해 주시길 노래한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지금 심한 멸시가운데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의 멸시에 시인의 영혼은 주님의 은혜를 갈급한다.

/ /예수님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생과 내세의 삶을 이야기로 말씀하셨다. (눅16) 시인은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주님을 바라본다. 주님은 거지 나사로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신다. 이생에서 거지 나사로를 멸시한 부자는 지옥에서 물한방울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나 소용없었다. 주님이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키실 지, 혹은 왼쪽을 가리키실 지 두려움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땅에서 한 부자로 (이름도 없다) 좋은 옷을 입고 호화롭게 파티를 즐기면서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면서 지낸다면 주님의 손은 염소들 편을 가리키실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멸시를 함께 받으면 우리 주님의 손은 양들 편을 가리키실 것이다.

시인은 멸시 가득한 이땅에 살면서도 하늘나라 백성으로 주님의 손을 바라본다. 온전한 성전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이 땅에서 심한 멸시를 받아도 눈을 하늘에 계시는 주님을 향하고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노래는.

시인은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땅에서의 멸시를 인내로 노래해 낸다.

히브리서 13:18-2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기도요청을 한다. 기도제목은 히브리서 저자와 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만 선하다고 하셨다. 결국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기도요청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양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요청을 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돌아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성도의 교제도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선한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분명히 한다. 이 평강의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로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하나님의) 일에 온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실 수 있게 하신다. 성도들이 더불어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신다. 그것도 영원토록. 이 모든 것을 (기도를)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아멘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권면한다. 히브리서 본문에서 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당부한다.  투옥되었던 형제 디모데가 풀려난 소식을 전하면서 디모데를 만나 함께 방문하고 싶다고 전한다. 그리고 독자들의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도 문안 인사를 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누군지는 모르지만 히브리서 저자와 함께 있는 ) 자들도 문안을 전해달라고 한다.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새언약에 따라 아무런 댓가 없이 주어졌다는 의미다. 저자는 이 약속에 대한 소망이 독자들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다.

//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믿음으로’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함으로’라고 자주 바꿔 읽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읽어 본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너무 자연스러웠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그대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예배다. 사랑과 선행이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이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된다. 첫언약의 종교적 육체의 예법에서 새언약의 마음의 예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첫언약의 율법을, 육체의 예법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말씀을 죽은 문자로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복음도 바리새인처럼 외식함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해 주셨지만 그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따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새언약, 마음의 예법을 따르는 것은 정말 어렵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믿음으로’는 분명히 마음의 예법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이다.

매일매일 말씀앞에 나오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1세기 독자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오늘 우리(나)에게 새롭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래된 참고서가 아니다. 지금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읽기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