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1-17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의 삶을 계속해서 설명한다.

  1. 형제를 사랑하라. 한번 두번이 아니라 계속 사랑하라고 명한다.
  2.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아라. 손님중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접하라고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오는 손님뿐 아니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약자인 자들을 찾아가 손님처럼 대접하라는 뜻이다.
  3. 갇힌 자,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것은 그들 편에 서라는 뜻이 강하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도 갇힌자요 몸을 가진자라고 설명한다.
  4. 모든 혼외성애는 음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자족하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지키시는 주인은 돈이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6.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특별히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믿음으로 사는 구체적인 삶을 교훈하다가 히브리서 저자는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우리를 인도하던 자들의 최고봉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선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교훈에, 다른 복음에 끌리지 말라.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첫 언약에 따른 음식 규정(육체의 예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대신 마음의 예법, 새언약을 따르라고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있는 제단에서는 첫언약에 따라 제사드리는 사람들은 먹을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앞부분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이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이땅에서 첫언약에 따른 제사는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고 짐승의 몸은 영문 밖에서 불살라 버린다. 새언약의 제사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의 보혈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성소로 들어가시고 자신의 몸은 단번에 온전한 제물로 성문 밖에서 드리셨다.

13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라고 편지했는데,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는 권면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즉 복음전파의 일꾼이 되자는 뜻이 아닐까?

하나님나라는 장차 올 나라다. 성도들이 성전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나라다. (그러나) 이땅에서도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영적 예배를 성부하나님께 드리는 나라다. 주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이땅에서도 맛보는 (입술의 열매인)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 다시말해 오직 선을 행함과 사로 나누어 주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한다.

(몇번째 적용인지 번호 붙이는 것을 도중에 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이중적으로 명령한다. 순종하고 복종하라. 여기서 지도자들은 영적 지도자들이다. 영혼을 돌보는 지도자들이다. 영혼을 돌보는 지도자들도 자신들이 어떻게 영혼을 돌보았는지 하나님께 보고할 때가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영적 지도자들이 괴로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순종하라고 한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지도자들이 근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을 탄식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가르침의 핵심은 말씀이다.

길다. 하루종일 곱씹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

#혼외성애

히브리서 12:14-29

13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똑바로 걸으면, 바른 길을 걸으면 무겁고 얽매이는 죄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을 따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산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증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똑바로/ 바르게 걷는 ‘믿음으로’의 삶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징계하시는 이유를 징계 받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산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더불의 화평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거룩함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거룩함도 따르라고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경고한다. 거룩함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요 정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복한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 즉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쓴뿌리가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쓴뿌리가 괴롭게 한다는 것을 봐서는 무겁고 얽매는 죄를 깨닫게 하는 첫언약,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는 죄인으로 머물게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을 음행하는 자요,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파는 망령된 자라고 예를 들며 이런 자들이 공동체에 없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간구해도 이미 버린 바 되어 회개할 기회가 없다고 한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조차 없는 이유를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 다시말하면 첫언약을 주신(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모세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말한 그 하나님께 첫언약을 의지해서 나아갔다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끼운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새언약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시온 산, 즉 11장 10절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온전한 성전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고 가르친다. 그곳은 수많은 천군천사들과 하나님의 장자들의 (자녀들의) 모임과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큰’ 대제사장 예수가 계신 곳이다. 아벨의 피보다 더 능력있는 예수의 피로 정결케 된 곳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첫언약을 거역한 이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새언약을 거역하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첫언약의 거역으로 땅에서 진노하신 하나님은 새언약을 거역하면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진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진동한다는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는 뜻이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야고보는 열두지파에게 편지한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분으로 소개했다. 진동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고 영존하는 것이 알곡이다. 두마음을 품어 흔들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 즉 알곡을 들이는 곳간을 받은 자라고 설명한다. 함께 이 은혜를 받자고 말한다. 은혜를 받은 자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바람에 나는 겨를, 곧 악인을 소멸하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화평하라. 하나님의 자녀됨이다.

거룩하라. 하나님을 뵙는 길이다.

믿음의 길을 걸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를 (코칭을) 달게 받아야 하나님의 소멸의 불을 피할 수 있다.

 

히브리서 12:1-13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따라) 산 사람들은 많다. 11장에서 언급된 이름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증인들, 즉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첫언약(율법)에 따른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했다. 믿음의 경주의 결승점은 믿음의 주님이시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신 예수님이 계신 곳이다. 즉 믿음의 경주는 예수님을 향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경주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 즉 상속자가 되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대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님께서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셨다. 성부하나님께 나아가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하는 독자들에게도 (지금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피곤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일을 참아내셨으니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님도 피곤하고 낙심되는 경주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받을 약속을 소망함으로) 완주하셨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죄와 싸우고 있는 독자들을 격려한다. 너희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너희 몸을 무겁게 하고 너희를 얽매는 것이 (죄가) 있다면 피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한다. 독자들에게 무거운 것과 얽매이는 것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왜 잊었느냐고 반문한다. 주님께서 무거운 것을 버리고 얽매는 것을 벗어버리라고 징계하시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친다. 주님께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주님의 징계와 꾸지람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코치의 작전이요 격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징계도 하시고 채찍질도 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징계와 채찍질을 참아내면 예수님처럼 결승점을 통과해서 하나님께 담대해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자녀가) 된다.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만약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징계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회초리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징계하는 분은 그냥 코치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한다. 그래서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듯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육신의 부모는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 즉 믿음의 결승점을 통과하여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도록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물론 징계는 (하나 받으나) 결코 즐겁지 않다. 징계를 받으면 슬프고 힘들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 연단을 받으면 의와 평강의 열매을 맺는다. 하나님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예수님이 가신 믿음의 길을 따라 달려야 한다고 권면한다. 믿음의 길을 따라 달리면 우리를 무겁게 얽어매는 것들을 (죄를) 벗어버리고 온전히 믿음의 경주를 마칠 수 있도록 돕는 주님의 징계를 달게 받을 수 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이라도 믿음의 길을 따라 달리라고 하신다. 주님의 징계와 채찍질을 받으며 달려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며 달려라.

주일 아침! 주님의 코칭을 기대하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으로 주 앞에 나아갑니다.

히브리서 11:32-40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많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산 모든 사람들의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다. 믿음으로 살았다고 이들의 삶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는 평가를 받는 다윗도 간음과 살인, 그리고 인구조사라는 불순종의 흑역사를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으로’,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며 살았다. 믿음으로의 삶을 산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기도 하였고 의를 행하기도 하였고 부분적이지만 이땅에서도 약속을 받기도 하였고 다니엘처럼 사자들의 입에서도 살아났고 다니엘의 세친구처럼 불의 세력에서도 살아났고 칼날의 피할 수 있었으며 연약한 가운데서도 강할 수 있었고 전쟁에서는 용감할 수 있었다. 엘리야/엘리사를 각각 봉양했던 과부 둘은 자기 아들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남을 맛보았다(왕상 17, 왕하4). ‘믿음으로’의 삶은 승리만이 아니다. 핍박받던 성도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주기철 목사가 있지 않은가?)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투옥의 시련도, 돌에 맞는 것과 톱으로 켜는 고문과 배교에 대한 유혹/시험과 사형을 당하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박해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바울이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한 그대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이땅에서 약속된 것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10절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나님나라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가는 우리(성도)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하나님나라는 온성도가 함께 지어져 가는 나라다.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시작한다. 그러나 교회로 구원을 완성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나님나라! …

히브리서 11:23-31

이어지는 ‘믿음으로’는 모세로 이어진다. 아니 모세의 부모에게로 이어진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왕(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동안 모세를 숨겼다.

부모의 ‘믿음으로’를 이어받은 모세는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는 무엇일까?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성육신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의 그림자로 보는 것일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서의 수모를, 즉 (고난의 현장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사귀는 것을,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편에 서는 것을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으로 여겼다고 이해하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모세에게 출애굽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유월절과 홍해를 건넌 사건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홍해를 건넌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믿음 없이 물벽사이로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똑같이 바닷물벽사이로 뛰어든 애굽군대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익사했다.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는 의미다. 믿음으로 여리고성도 무너졌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여리고성을 돌았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기 때문에,  불순종의 여리고성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오늘도 ‘믿음으로’ 자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를 넣고 읽어보았다. 크게 무리가 없다. 히브리서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여’가 맞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하는 삶이다.

순종 소망 , Obey and Hope

//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마지막 문장이  Wait and Hope 이다. 기다림이 소극적이라면 순종은 적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