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13-22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말하면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죽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약속을 멀리서 보았다. 심지어 약속에 대한 보증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이땅에서는 타향살이를 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들은 약속이 이루어질 본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생각한 본향은 이땅에 있는 고향이 아니었다. 이땅에 있는 고향이라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본 본향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나라다.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전이 본향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성이다.

믿음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시 소환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받은 약속이었던 이삭을 다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라도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가 (이삭이) 영원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순환이다.

이삭도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했다. 이삭이 원하는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했다는 의미다. 믿음으로 야곱도 요셉의 각 아들들에게 축복했다. 요셉의 (원)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축복했다. 믿음으로 요셉도 (먼 훗날의) 출애굽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소망했다. 믿음이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에 대한 소망’이다.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이 곧 ‘믿음으로’다. 히브리서 11장 인물 어느 하나의 믿음도 추상적이지 않다. 그냥 하나님을 믿었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 자신들의 꾀를 따라 사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받을 약속도 이땅에서가 아니라 본향, 하나님나라에서 온전히 받을 것을 소망했다. 받을 약속을 이땅에서 가불해서 살려고 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먼저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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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다시말하면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죽었다. 이들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 부분적으로만 누렸다. 그러나 온전한 약속을 멀리서 보았다. 심지어 그 약속에 대한 보증만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이땅에서는 타향살이를 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들은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질 본향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바라본 본향은 하늘에 있다. 하나님나라다. 하늘에 있는 완전한 성전이 본향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을 약속인 영생을 누리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성이다. 다른 약속은 없다. …

(히 11:13-22 읽기)

히브리서 11:1-12

믿음은? 개인적으로 히브리서 10장까지에서 믿음을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는 소망이라고 정리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을 시작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 한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새번역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으로 번역한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히브리서 10장까지를 정리하면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함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다. 결국 돌고돌아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실제의 삶이고 보이지 않는 약속,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받게 될 약속 (성자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의 증거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 믿음으로 자신에게 믿음 있음을 증명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의 첫번째 예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 믿음으로 된 것이라면 창조역시 성자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창조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교제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독자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를 아는 것도 ‘믿음으로’ 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아는 가장 중요한 통로(방법)임을 전제한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직접증거는 없다. 그리나 아직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 즉 믿음에 대한 증거가 필요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함으로 간접 증거를 제시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한다.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가 어찌 하나님을 찾고 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 확실하다. 에녹뿐만 아니다.

아벨도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을 했다. 노아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방주를 준비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

아벨은 죽었으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자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허다한 별과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믿음은 순종이다. 가식적인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순종의 능력이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에 대한 확신이다.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이게 믿음이다.

히브리서 10:26-39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즉 새언약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새언약을 받은 후에도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를 이미 드리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를 범하면 무서운 심판과 죄인을 태울 맹렬한 불만 있다고 경고한다.

모세의 율법을 범한 사람도 두세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용서없이 사형을 받았다. 새언약을 범하는 것은 성자 예수님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무거울지 (삼가) 생각하라고 명한다. 히브리서 저자와 독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으시는 분이시고 또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새언약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내면 벌이 아니라 큰 상이 기다린다. 새언약을 받은 후의 고난의 큰 싸움을 히브리서 저자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세상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을 기쁘게 당한 것도 이런 큰 고통이 바로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확신 이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큰 상(구원)을 얻는길이기 때문이다.

고난의 큰 싸움 끝에 있는 큰 상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란 우리가 새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후에 큰 상을 받기까지 고난의 큰 싸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다시오실 주님이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다. 우리는 새언약을 받고도 죄를 범한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기에 심판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어찌할 것인가? 히브리서 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마음의 예법에 따라 죄를 깨닫고 돌이켜 말씀에 순종하라고 한다. 만약 첫 언약인 육체의 예법에 미련을 두고 다시 속죄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뒤로 물러나 멸망하지 말라고 한다. 속죄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것은 완전한 제사가 될 수없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는 소망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누구나 죽는다. 그 후에는 승패만 있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도록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이미 드리셨다. 고난의 큰 싸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 근심에 사로 잡히는 것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결국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요즘 반복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라는 것이다. 나의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을 당하더라도 기쁨으로 그들 편에 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이라고 하신다.

정의와 공의

히브리서 10:19-25

그러므로는 새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성도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이어 받는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더이상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도 예수의 피,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온전한 속죄제를 드리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있는 참 성소, 곧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휘장으로 막혔던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한시적이 아니라) 완전히 영원히 열렸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성부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새로운 살 길이라고 한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몸이 곧 휘장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또 예수님은 하늘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의 집, 곧 참 성전(성전의 본체)에서 ‘큰’대제사장의 직무를 맡고계신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기도하신다. ‘큰’ 대제사장 되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 한 번 자신이 흘리신 보혈을 뿌려 마음(양심)까지 정결하게 되도록 성도들의 죄를 씻어주신다. 성도들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는 직무를 담당하신다. 이것이 새언약이다.

새언약을 약속하신 성부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다. 성도들은 이 도리, 곧 새언약의 소망에서 흔들리면 안된다. 오히려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런데 쉽지 않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성도가 서로 서로 도와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믿는 도리의 소망를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한다. 믿음은, 새로운 살 길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형제를 돌아보는 것이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어서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믿음은 낮은 자의 편에 서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그곳에 삼위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생이다. 영생을 누리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참 성소/성전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본다고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돌아볼 때 보인다. 성도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사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방법이다. 더욱 그리해야 한다.

히브리서 10:1-18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한번 첫 언약, 즉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마음의 예법, 새 언약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첫언약인 율법을 따라 해마다 드려야 하는 제사는 온전하지 않다고 한다.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은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는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만약 한번에 온전히 정결하게 되었다면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할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서 제사 드리는 일을 그쳤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언약에 따라 드리는 제사들은 매년 갱신되어야 한다. 짐승의 피로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앞에서는 사람의 양심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세상 제물 역시 제사장들처럼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불완전한) 제사와 예물을 원하시지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제물을 예비하셨는데, 성자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자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고 한다.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 하신 말씀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적었다. 시40에서 시인 다윗의 노래를 주님의 노래로 재해석 한다.)

이것이 ‘큰’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개혁’이다. 첫 언약에 따라 세워진 아론의 자손된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가히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율법에 따른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라 순종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 그래서 첫 언약을 폐사히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는 불완전한 제물로 드리는 제사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완전한 제물로 드리셔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첫 언약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는 아무리 자주 드려도 항상 불완전해서 죄를 없게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제사는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죄인 됨만 깨닫게 해 준다.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것인데 반복되는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음만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번에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심판 때까지 더이상 죄를 깨달아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이것이 새언약이요 마음의 예법이라고 성령도 깨닫게 해 주신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해 주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게 된 자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자주 반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하셔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삶을 반복하는 대신 거룩하게 (하나님의의 뜻을 행하며) 살라고 하신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다. 임마누엘을 매일 구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제사)다. 주일 아침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